미국에서 아기를 출산한다는 건
미국에서 아기 낳아서 좋겠네
주변 지인들 중 어떤 이가 소식을 듣자 말자 했던 말 중에 하나이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아기를 출산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사실 나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냥 단지 그 순간에 기적 같이 찾아와 준 아기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연예인들 해외원정출산 뉴스 같은 걸 볼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완전 남의 일이고, 관심도 없고,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실현 가능하다고 해도 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시민권이고 뭐고 간에 난 남편과 몇 년 후에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고, 여기서 태어난 아기가 다시 미국에 온다는 보장도 없고, 우리가 다시 미국에 살 계획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고작 아기가 미국 입국 심사할 때 줄을 좀 덜 서도 되겠지 정도의 일인데, 저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저런 말보다 지금 나에게 급한 건, 갑자기 미국에서 살게 되고, 아기가 생긴 걸 알게 되고, 출산할 때도 남편과 이곳에 있어야 하므로, 미국에서 아기를 출산해 내야 하는 똑똑하고 준비된 엄마가 되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일단 미국은 우리나라와 의료 시스템이 다르다. 우리나라는 건강 보험을 기준으로 온 국민이 의료 혜택을 받는 의료 최강국이다. 외국에 나와보니 더 절실히 느끼는 건강 보험의 힘. 한국에서는 매달 월급에서 건강 보험비를 그렇게 많이 떼는 걸 보면서, 아 나는 아프지도 않은데 이건 진짜 손해인가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외국에 나와 보니,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의료 시스템은, '비즈니스'이다.
영어 학원 선생님께 병원 다니는 게 한국과 달라서 힘들다고 말했더니, 미국의 의료시스템은 'business'라고 딱 잘라 말해주었다. 미국은 다양한 보험 회사가 있고, 어떤 보험에 가입하느냐에 따라 병원비의 커버 정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런 보험조차 넣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프면 병원에 바로 가지 않고, 일단 참는다. 그리고 더 아프면 'urgent care'에 간다. 감기 정도는 약국에서 약을 사 먹거나 'urgent care'에 가서 진료를 보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urgent care'는 예약 없이 당일에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임신테스트기로 아기를 확인한 후, 병원을 예약하기 위해, 남편과 병원에 방문했다. 임신은 'urgent care'로 진료를 받을 수 없고, 병원에 방문해야 한다고 해서 갔는데, 방문 전 예약 없이는 당일 진료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소 8~9주 이상이 되어야만 진료를 봐줄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은 임신하면 바로 동네 산부인과에 가서 아기집을 초음파로 확인하고, 임산부 등록을 하고, 바우처를 받는 등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출산을 관리하는 것과 아주 많이 달랐다.
그렇게 3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피가 났고, 우리는 혹시 몰라 병원의 'ER'을 급하게 방문했다. 'ER'은 보험 커버를 넘어설 수도 있다고 해서 걱정했지만, 일단 아기가 무사한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ER'도 초음파를 보고 피를 뽑고 결과를 듣는데 무려 6~7시간이 걸렸다. 물론 내가 그만큼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 놓인 임산부나 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나라와 다른 의료 시스템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다.
3주 뒤 우리는 예약된 산부인과로 갔다. 초음파를 보더니 아기가 무사히 잘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고, 의사와 면담을 간단하게 나눴다. 그리고 임신 중에는 별일이 없으면 총 3번 정도 초음파를 볼 예정이고, 분만은 시내에 있는 'labor & dilivery' 전문 병원에서 해야 한다고 안내해 주었다. 아 이렇게 또 달랐다. 한국은 내가 다니는 동네 산부인과에서 출산을 할 수 있지만, 미국은 분만 전문 병원이 따로 있었다. 주로 지점에서 임신 기간 동안 관리를 받다가, 본점 같은 분만 전문 병원에서 출산과 분만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내 주치의가 분만 과정을 함께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순조롭게 분만할 경우 조산사라 불리는 midwife만으로 분만을 할 수 있다고도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그렇게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들에겐 당연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아기가 태어나고 가야 할 소아과 역시 미리 예약해야 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긴 병원 예약이 힘드니깐, 그것 역시 미리 알아봐야 했다. 그런데 또 나중에 알고 보니, new born baby를 위한 자리를 항상 남겨두므로 충분히 고민해 보고 예약해도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험, 병원 선택, 임산부 관리, 출산 과정, 출산 이후의 일 등 모든 면이 한국과 다른 의료 시스템의 늪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이 가장 아기를 위한 것일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크게 2개의 병원이 있고, 둘 중에 한 병원에 가면 다른 병원에서는 동일 진료를 보지 않아야 한다는 서약서를 처음에 받았다. 그런데 임신을 하는 동안 아기에게 조그마한 일이 있었고, 그 일이 우리 부부에게는 눈더미 같이 큰 일이라, 지금 병원이 여유롭게 느긋하게 대처하는 것에 대해 많은 불만이 쌓였다. 미국이라 원래 느린 것도 있고, 한국이랑 다른 의료 시스템인 것이 당연하지만, 초보 엄빠인 우리의 마음은 조급해져만 갔다. 주변에 알아보니 서약서는 그냥 서약서일 뿐이므로, 그냥 다른 병원 진료도 봐도 된다는 말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았지만, 그 병원 역시도 이전 병원에서의 추가 검사 이후에 트랜스퍼가 가능하다는 말을 해주었다. 다른 병원 진료를 보고 나면 어느 정도 상황이 객관적으로 인지되고 정리될 것이라 생각했던 우리에게, 결국은 그냥 아기를 믿고 잘 크고 있을 거라 응원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곳에서는 그런 정보를 잘 얻기 위해서 한인교회를 나가야 한다는 분들도 있었다. 믿음이 없어도 한인교회는 정보의 장이므로, 그런 곳에 가면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교회에 가는 것에 주저함이 생겼다. 그냥 그런 정보만을 얻기 위해 불쑥 찾아가는 것이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 미국인들, 회사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한정된 정보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이제 다음 주면 또 우리 아기 정밀 초음파를 다시 보러 간다. 그걸 보고 나면 좀 결정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동안은 이런저런 일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아기를 믿고, 나를 믿고, 남편을 믿고, 밥 잘 챙겨 먹으면서, 미국의 의료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날들을 보내면서 출산하는 그날을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