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미국에서의 삶, 시작
"나, 미국으로 주재원 가라고 할 것 같아"
2023년 어느 날, 직장 생활하랴, 시험 준비 하랴, 결혼 준비 하랴,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에게 12년을 사귄 우리 남친, 지금의 남편이 저렇게 말했다.
사실, 우리는, 남편이 지금 회사를 다니다가, 주재원을 한번 나가게 되면 참 좋지 않을까. 그러니깐 우리 영어 공부도 하고, 학위도 좀 더 알아보는 게 어떨까 이런 농담 아닌 농담으로 인생 계획을 세우곤 했었다.
나는 임용을 준비하는 동안 공부해야 하니, 자기도 공부를 해보는 건 어떨까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그렇게 마냥 하염없이 언젠간 그렇게 되겠구나, 그렇게 되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만 했었는데.
고객사에서 해외 직원들이 올 때마다, 회사 대표로 영어 안내를 한다길래, 뭐 아저씨들이 많아서, 그중에 기본 회화 하는 건 남편뿐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해외 출장을 종종 가길래, 하휴 고생이 많네 우리 남편. 이런 생각을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중에 주재원 발령받고 해외로 나와보니, 다른 주재원 와이프들도 다 저런 생각을 했더라지. 그렇게 해외 출장을 돌고 돌다 주재원 발령을 낸다는 느낌. 하하.
사실 우리에게 2023년은 아주 바쁘게 힘들고 정신없는 한 해였다.
우선 나는, 부모님 병원을 챙겨야 했고, 자사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수업과 수능 준비를 시켜야 했으며, 내 임용 시험 준비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12년을 사귄 전 남친이자 현 남편은, 더 이상 결혼을 미루고 싶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했었다. 그래, 매일 같이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살 순 없다. 남편에게 더 이상 기다려달라고 하는 것도 미안하고, 언제까지 내일만을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살 순 없다. 이렇게 생각하며, 임용 시험이 끝난 한 달 뒤, 바로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러는 와중에 남편이 저 말을 나에게 던진 거였다. 회사에서는, 기왕 보내고 싶었는데, 결혼까지 한다고 하니, 기혼자를 보내는 규정 상 완벽한 타깃이 된 셈이었다. 남편은 결혼 전 3달을 출장자로 미국으로 출장을 갔고, 그 사이에 나는 2학기를 정신없이 보내며 임용 시험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임용 시험을 보고, 한 달 잠시 귀국한 남편과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일주일 뒤, 남편은 다시 출장자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떠났고. 나는 사립 재단 시험과 공립 임용 시험 최종을 모두 준비하며, 정신없이 바쁜 날을 보냈다.
그렇게, 공립 임용 시험 발표 전 날, 남편은 귀국했고, 합격의 기쁨을 함께 누리며, 3월부터 정식 주재원 발령이 난다는 말에, 일단 우린, 서로 1년을 떨어져 지내보자고 했다. 2월 한 달을 신혼부부처럼 재미나게 붙어 지내다가, 3월 1일 자로 다시 미국으로 들어간 남편. 그리고 3월 1일 자로 그렇게 원하던 정교사의 삶을 살기 시작한 나. 각자 새로운 삶을 도전하느라 정신없이 두 계절을 보내고, 여름 방학 때, 나는 남편을 만나러 미국으로 잠시 여행을 왔다.
환승에 환승을 거쳐 도착한 미국 공항에서,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남편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참 마음이 아팠다. 정신없이 나의 삶을 사느라, 매일 같이 영상 통화에 연락을 끝없이 하지만, 이렇게 우리 남편을 실물 전신샷으로 보니, 참... 왜 이렇게 말랐는지, 왜 이렇게 피부가 안 좋아졌는지. 이 사람이 이렇게 먼 타지에서 힘들게 적응하고 힘들게 일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아 나 와야겠다. 남편 옆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3주 간의 황금 같은 방학을 보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LA공항에서, 우리는 참 많이 울었다. 평생 F로 살아온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소리를 죽이며 계속 울었다. 그런데 파워 T인 남편도 내가 떠난 미국 집에 돌아가서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고 한다. 다 큰 어른이, 왜 그렇게도 서로가 없음에 힘들었는지. 그래서 우린 그렇게 더 단단한 부부가 되었고, 2024년의 나는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나에게 소중한 많은 것들을 놓기로 결정했다. 내가 꿈을 이룰 수 있게 묵묵히 옆을 지켜준 남편처럼, 몇 년 간 나도, 남편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묵묵히 옆을 지켜주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커리어, 나의 사람들, 나의 아이들, 나의 가족들. 많은 것들을 놓고 집에서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끝도 없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미국 생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