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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허실 Dec 22. 2018

역차별이 평등이다

여성의 삶, 남성의 삶

2016년에 기사 하나를 페이스북에 공유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그 당시 이 내용에 대해 좀 더 길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메모 앱에 기사 링크와 함께 '역차별이 평등이다'라는 제목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대충 기록해두었는데 얼마 전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길든 짧든 나의 생각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녀관계에서 평등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남성은 개저씨일 확률이 높다. 사회적 권력의 대부분을 남성이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남성 스스로 불평등하다고 느낄 때가 진짜 평등한 관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계급 사회였던 조선 시대가 끝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시대가 왔을 때 누가 제일 불평등하다고 느꼈을지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2016.06.17 페이스북 기록 | 관련기사 '당신 개저씨인가, 젠틀맨인가' https://bit.ly/2BAlpbL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2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여혐, 남혐, 성평등, 페미니즘, 미투 등 그동안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암묵적으로 용인이 되었던, 그리고 객관적으로 돌아보기 어려웠던 다양한 젠더 이슈가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직 사회적 담론으로 형성되기에는 더 많은 대화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렇게까지 첨예하게 남녀가 대립을 하는 과정조차도 나는 성평등 사회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한 진통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진통이 큰 이유는 그만큼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공공성과 건강함을 갉아먹는 큰 병이었기 때문이다. 수술에 비유하자면 지금은 단순히 문제가 되는 부위를 개봉만 했을 뿐인데도 그동안 곪고 썩은 내가 진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마다 현재의 상황을 보는 시점은 다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정작 제일 중요한 수술은 들어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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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 통계 중 20대의 지지도 분포를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20대 지지도의 남녀 차이가 모든 세대에서 가장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20대 남성의 긍정 평가는 29.4%, 부정 평가는 64.1%이고 20대 여성의 긍정 평가는 63.5%, 부정 평가는 29.1%다. 20대 남성의 긍정 평가는 모든 세대를 통틀어서 가장 낮은 수치다. 


이들의 긍정 평가가 낮은 이유는 일자리나 경제 등 다양한 사회적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으로 젠더 이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사회적 논란이 되는 일베 같은 사이트를 들어가지 않아도 남성 중심의 온라인 커뮤니티나 젠더 관련 기사의 댓글을 보면 남성들의 울분에 찬 글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수많은 글 속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키워드는 바로 '역차별'이다.


내용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글 속에서 발견되는 '역차별'의 사례는 참 많다. 실제 사실인 부분도 있을 것이고 분위기에 휩쓸려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관심 좀 얻으려는 사람들의 철없는 거짓말일 수도 있다. 어쨌든 다양한 글 속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정말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억울함과 여성 일반에 대한 적대적 분노다. 


하지만 남성들이 느끼는 '역차별'은 개인의 경험에 따라 부분적 사실일 수 있지만 사회적 현상이 될 정도는 아니며 그 느낌조차 주관적 경험의 총합일 뿐 객관적 정량으로 측정된 데이터도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별에 대해 어느 누군가 객관적으로 정량적인 평가를 한다면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아직까지도 압도적으로 차별받는 것은 여성이다. 다만 사회적 차별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남녀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차별적 행위를 해오던 사람에게 지금처럼 평등으로 가는 과정은 역차별이라고 '느낄' 수 있다. 다만 그것은 느낌일 뿐 객관적 사실은 아니다. 그냥 몇십 년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혜택을 받으며 편하게 살아오며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면 된다. 


더디기는 하지만 성평등 관련 입법이 국회에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고 우리 일상을 돌아보더라도 사회는 이제 충분히 평등한 것 같은데 마치 남성 일반을 잠재적 범죄자로 모는 듯한 사회적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남녀 관계 속에서 남성 스스로 '역차별'이라고 느끼는 부분이 생긴다면 그 순간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오랜 기간 기울어진 운동장에 익숙해진 나침반이 정상을 회복했을 때 순간적으로 제대로 된 방향을 가리키기는 어려운 것과 비슷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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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하반기에 학생들과 토론 수업을 하면서 다양한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았는데 한 번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너와 내가 지금 이 순간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하나의 컵을 서로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는 같은 모양의 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우리가 같은 컵을 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객관적인 방법은 없다. 유일한 방법은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현재의 젠더 이슈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쉽게 가라앉아서도 안된다. 이런 분위기가 성별 대결이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유의미한 담론이 형성되어야 4차 산업 혁명이든 공유 경제든 성숙한 시민 의식 속에서 서로가 행복한 균형 있는 성장을 할 수 있다. 다만 현재의 분위기를 보면 '성평등', '페미니즘' 등 젠더 이슈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동일 언어를 사용하며 다양한 발언을 하지만 같은 언어를 써도 이렇게 대립이 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동안 너무 다른 세계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상태라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더욱 극한의 대립만 생겨날 뿐이다. 이런 때일수록 분노의 화살을 서로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각자의 삶을 돌아보는 과정을 가지는 것이 어떨까.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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