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수많은 상처와 갈등을 겪고 성장한 후에야
나와 결이 다른 사람과 잘 지내기 위하여, 나를 깎고 다듬는 노력은 멈추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야 나는,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 잘 지내기 위해 나를 깎고 다듬는 노력을 멈추어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끊어내도 된다는 사실을 배웠는데
어린 시절의 나는, 모든 친구들과 잘 지내라고 배웠다.
서로 성격과 성향이 맞지 않아,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친구와 멀어지고 끊어내도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어른은 없었다.
"쟤는 질이 나쁜 아이니까 같이 놀지마"라는 충고는 들어봤으나
나의 성향과 상반된 아이와도 잘 지내기 위해, 나를 깎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어른은 없었다.
아무래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보고 스스로 깨달으라는 뜻인 것 같다.
덕분에 어린 시절의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그 시행착오를 통해, 나도 상처를 받고 상대도 상처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나는 이 시행착오를 두고, '왕따'나 '학교 폭력'이라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언어적 폭력을 가하거나, 신체적 폭력을 가하거나, 물건을 훔치거나, 돈을 갈취하는 행동은 학교 폭력이 맞다.
하지만, 친구들 간의 다툼을 두고, 학교 폭력이라 몰고 가서는 안된다.
친구와 멀어진 것을 두고, 왕따라 몰고 가서도 안된다.
약속시간에 자주 늦는 친구에게 "어떻게 맨날 약속시간에 늦을 수 있니!?"라고 화를 낸 후, 싸워서 서로 대화하지 않는 것
나랑 더 친한 줄 알았던 친구가, 나보다 더 친한 친구를 사귀게 되어, 서운한 마음에 토라져 함께 놀지 않는 것
공부를 안 했다고 해놓고 시험을 잘 본 후, 시험 망친 내 옆에서 행복해하는 친구에게 얄미운 마음이 생기는 것
여러 가지 이유로 잘 놀던 친구와 멀어질 수 있다.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질 수 있고, 영영 멀어질 수도 있다.
굳이, 꼭 다시금 가까워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내가 멀어지는 사이, 다른 친구들도 그 친구와 멀어질 수 있으며, 때문에 그 친구는 한 번에 많은 친구들을 잃을 수도 있다.
물론 그 상황에서, 집단적 언어적 폭력이나 신체적 폭력과 같은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가정하에 말하는 것이다.
아무도 내게 폭력을 가하지 않고 그저 멀어지기만 했다면, 지난 나의 행동을 되돌아 볼 필요도 있다.
성인이 된 내게, 나와 정말 맞지 않는 사람과 잘 지내라는 요구를 받는다는 상상을 해 보았다.
매일매일 하루가 멀다 하고 징징거리고 투덜거리는 친구가 있다.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 투덜 거리기만 하고, 자제를 부탁해도 그의 투덜거림이 줄지 않는다면,
그의 투덜거림으로 인해 내 마음에 병이 생길 것 같다면
그의 징징+투덜거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를 끊어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 내게, "안돼! 그의 징징과 투덜거림까지 받아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야. 함께 잘 지내보도록 해"라는 요구를 받아 이를 행하게 된다면, 난 분명 정신병에 걸릴 것이다.
세상에 닳고 닳은 성인인 나에게도 이렇게 힘든 일인데, 어린 청소년들은 오죽할까.
'모든 친구들과 친하게 잘 지내'라는 말이 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폭력인지 다툼인지, 왕따인지 시행착오인지 알아볼 눈을 가질 필요가 있다.
'피해자'라 주장하는 모든 이들이 정말 '피해자'인지
혹시, 서로 시행착오를 겪던 '피해자이자 가해자'는 아닌지
누가 먼저 폭로했느냐에 따라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뉜 건 아닌지
현재 누가 더 대중의 질투와 미움을 받고 있어서 '가해자'로 낙인찍힌 건 아닌지
알아보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