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후퇴 그리고 다시 시작된 피난길

나는 두렵지 않았다.

by 후이빈

서울에 돌아와 가족과 함께 다시 안정을 찾는 동안 한 계절이 훌쩍 흘러 겨울이 왔다. 날씨는 추웠지만 내가 겪은 무서웠던 도망생활에 비하면 나는 더 두려울 것도 슬플 것도 없었다. 전쟁이 나기 이전과 다름없이 우리는 바쁘게 생활했지만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의 빈자리가 문득문득 내 마음을 짓눌렀다. 가족들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금기시했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것으로 전쟁의 아픈 기억을 잊으려는 것 같았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깊숙이 베어낸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북진한 국군은 다시 밀리고 있었다. 중공군이 합세했다는 불안한 소식이 들리더니 해가 넘어가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는 듯했다. 결국 1월 4일 우리 국군이 다시 철수하고 적들이 내려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우리는 가게가 안정되기가 무섭게 또다시 짐을 싸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한 번의 갑작스러운 피난길을 겪은 터라 우리는 이번엔 미리 대구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그 노력도 헛되이 가는 길에 한강다리가 끊어져 버렸다. 얼음을 건너 남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지 않으면 중공군에 잡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모두 악착같이 기차꼭대기에 기어 올라가서는 이미 올라와있는 수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달리는 차위의 추위를 견뎌야 했다. 오빠들은 그 급한 와중에도 쌀을 좀 챙겨갔는데 어떤 사람은 어떻게 들고 왔는지 가마니채로 쌀을 가져와서 꼭대기에 얹더니 조금씩 꺼내 씹어먹으면서 가기도 했다. 우리는 급한 대로 챙긴 그 약간의 식량이 그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바람을 타고 살을 찢는 듯한 추위를 얇은 코트로 겨우 겨우 버티고 있으면 이번엔 굴속을 지나가며 연기가 우리를 괴롭혔다. 기차는 가끔 굴속에서 정차하곤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때마다 쌀가마니에다가 코를 대면 산소가 나온다고 외쳐댔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연기에 죽을 것만 같은 사람들은 앞뒤 잴 것 없이 모두 따라 쌀가마니를 찾아댔다. 한참을 그러다가 기차가 다시 굴속을 빠져나가 밝은 햇빛아래 옆 사람을 쳐다보면 모두 하루 종일 석탄을 캔 인부처럼 하얀 눈만 빠꼼빠꼼하며 서로의 모습에 웃기도 하고 당황해하기도 했다.


며칠을 걸려 대구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영산강 근처 방한칸을 빌려 모든 식구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꿈에도 생각하기 싫은 피난길이었지만 가족이 모두 함께 있기에 나는 두렵지 않았다. 더 이상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지도 내일 먹을 걱정을 하며 어디서 잘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서 온 다른 피난민들은 보통 우리처럼 일곱, 여덟 명씩 작은 단칸방에 부대끼며 살았다. 대구에서 일 년 가까이 피난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대구친구들도 사귀고, 우리 오빠들은 부산에 내려가서 장사를 했다. 나는 가끔 오빠들에게 가서 가족에게 필요한 생활비를 타오곤 했는데 어느 날은 오빠들이 챙겨준 돈가방을 기차역 화장실 앞에다 잠시 놔두고 볼일을 보고 나왔더니 가방이 온데간데없는 것이었다. 정말 금방 나왔는데 없어져버린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그 가방에 석 달 치 생활비가 들었다고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나도 모르게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너무 놀라 울면서 다시 오빠들한테 갔더니 놀란 나를 보고 화나기보다 측은했는지 아무 말 없이 다시 돈을 챙겨주며 절대 놓고 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물론 그 후부터는 절대 돈을 놔두고 어딜 가지 않았고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나는 곧 내 기술을 살려 근처에 대구여자양장점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했다. 그곳 주인아주머니는 나에게 일을 야무지게 가르쳐주며 아껴주셨다. 아주머니는 통통하고 인심이 좋게 생긴 얼굴로 들어오는 손님마다 아주머니의 말에 흔쾌히 옷을 몇 벌씩 사가곤 했다. 아주머니와 비슷한 인상의 주인아저씨는 무엇보다 코가 어찌나 들창코인지 나는 아저씨가 지나갈 때마다 코밖에 안보였다. 한 번은 아주머니한테

“아줌마, 아저씨는 저 코로 맨날 냄새만 맡고 다닐 것 같아요”

라며 용감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때론 새로 사귄 친구들과는 야외소풍도 가고 그랬다. 김밥을 나누어 싸고 이쁜 꽃그림이 그려진 돗자리를 챙겨 나가면 기분이 그렇게 상큼할 수가 없었다. 가끔 친구들이 아는 남자들과도 동행했는데 그 무리 중 한 남자가 나에게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 키가 작고 눈썹이 짙었던 그 사람은 당시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면서 무역을 하는 부잣집 아들이었는데 출장에서 돌아올 때면 한창 유행이었던 양산을 사들고 내가 일하는 가게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나는 억지로 안겨준 선물을 받고서도 나는 오빠에게 혼날까 봐 친구네 집에 맡겨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못난 사람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 사람이 싫었다. 계속 찾아오기를 몇 달을 하더니 내가 거절하고 반응이 없는 걸 알았는지 차츰 연락이 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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