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렵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총을 맨 순사가 나타나 나를 일으켜세워 본서로 향했다. 약 30분정도 걸려 도착한 본서는 무척 컸다. 나의 팔을 움켜잡고 수사계장실에 들어가 서류를 탁 놓고 앉으라고 퉁명스럽게 내뱉더니 그길로 사라졌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고함소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나는 더 풀이 죽어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까만 자켓을 입은 30대 중반의 키큰 남자가 들어왔다. 책상에 놓여져 있는 내 서류를 힐끗 보더니 무엇이 눈길을 끌었는지 한참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강귀녀가 누구야?”
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는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까 가슴이 콩알만해져서 작은 목소리로
“전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를 휙 돌아보고는 가까이 다가와서 위아래를 훝어보더니 다시 서류를 보고 또 다시 내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는 듯했다.
“아니,강귀녀 니가 왜 여깄냐?”
내가 왜 여깄냐니, 나를 안다는 것인가? 무서워서 고개도 못 들던 나는 빠르게 눈길을 돌려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구지? 내가 일할 때 손님인가? 난 본 적이 없는것같은데. 용기를 내 얼굴을 한참을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는데 알고보니 작은 오빠의 친구였다. 내 서류에서 오빠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나를 알아본 것이었다. 나도 그 사람도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으니 얼굴을 모르는게 당연했다. 나는 이 무서운 세상에, 이 무서운 상황에서 나를 아는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불쌍한 사람 밥 날라주다가 억울하게 인민군에게 쫓기나 했더니 이젠 어처구니 없는 누명을 쓰고 말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죽는구나 생각한게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아버지만 겨우 꿈에서 보고 다른 가족들은 내가 이렇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슬퍼할까 생각하며 내 인생 참 기구하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나를 구원해줄 사람을 만나다니! 이런 생각에 이르자 순식간에 기운이 탁 빠지면서 그대로 그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동안 이를 악물고 참았던 나의 피난생활이 억울한건지, 누명이라고 하소연할 사람을 만나 기쁜 건지, 아니면 그냥 살았다는 안도감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휘몰아쳤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나를 잠시 두고 보던 그 사람은 나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모든 이야기를 했더니 잠시 듣다가 그 자리에서 증명서를 다 써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주머니를 모두 털어 부산가는 차비를 챙겨주며 괜히 무슨 일 생기기 전에 어서 여길 떠나라 했다. 삼일을 삼년처럼 절망속에 보내고 오빠친구를 만나 십년감수한 나는 얼른 부산을 빠져나가야 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르쳐준 대로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보니 이미 피난민들로 객실은 물론이요, 화물칸 기차위까지 꽉꽉 들어차있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화물칸안에 몸을 비집고 들어가 기차를 타는데 성공했다. 오빠친구를 만나면서 내게 옮붙었던 불운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그 안에서 아는 얼굴도 만나게 되었고 내 몰골을 보더니 손바닥만한 주먹밥을 잘라 주는 바람에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한참을 타고 서울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한걸음에 내달려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 가족 모두가 돈을 세며 즐거워했던 그 집은 이제 집터도 기둥도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지고 인기척하나 없었다. 정말 황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같이 흙더미만 남아 있었다. 너무나 기가 차고 허무해서 땅바닥에 앉아 하늘을 원망하다가 이내 가족들이 분명히 근처어딘가에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스치기 시작했다. 나는 곧 을지로 4가에 있는 우리 가게가 생각났다. 다시 걸음을 돌려 달려간 가게에서 비로소 어머니와 큰 오빠가족 그리고 둘째오빠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인생에 아픈 자욱을 남겼던 피난길이 끝나고 나는 다시 가족들과 만났다. 모든 위기가 지나갔다고 믿은 우리는 가게를 다시 시작했고 나는 가게 한쪽에서 사람을 고용해 양장점을 시작했다. 바로 옆이 영희국민학교였는데 다행히 미군이 많이 주둔해 있었고 온갖 몸치장을 하려는 양색시들로 양장점은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