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십 분 거리에 매일같이 가는 슈퍼가 있는 몰이 있는데 사실 그곳에 필라테스 스튜디오가 있긴 했다. 슈퍼는 매일같이 삼 년을 다녔으면서 필라테스는 한 번도 안 가봐서 그렇지. 항상 거기에 있긴 했다. 가끔 지나갈 때 잘 안 보이는 유리창사이로 힐끗 쳐다볼 때면 병원도 아닌데 침대 같은 게 보였다. 사람들이 거기 누워서 혹은 앉아서 무언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저게. 물리치료하는 덴가... 뭐 하는 걸까. 내 무릎도 아픈데. 꼬리뼈도. 몇 년 후에 내가 거기서 운동하고 티칭 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무심히 지나쳤었다.
그런 나를 필라테스로 안내해 준 것은 정작 멀리 살고 있는 내 친구였다. 먼저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육아 선배이자 먼저 필라테스를 시작해 강사의 길을 걷던 친구. 내 모든 임신출산 스토리를 알고 곁에서 보고 마음 아파했던 친구. 전화로 고통을 하소연하는 나에게 주변에 스튜디오가 있다면 속는 셈 치고 시작해 보라고 했다. 필라테스? 네가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나한테도 도움이 될까? 연예인들이 테이블에서 다리 찢기 하던데 그걸 나더러 하라고? 그것도 미국스튜디오에서?
모든 것은 때가 있다고 했던가. 만약 내가 다른 상황과 나이에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필라테스를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시큰한 무릎과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꼬리뼈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다른 운동은 많지 않았다.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남편과 오롯이 둘이서 육아를 해결해야 하는 미국땅에서 시간을 낼 여유 또한 많지 않았다. 남편과 아기가 자는 새벽시간이 나에게 가장 좋은 운동시간대였으며 그 시간에 십 분 거리 몰에 있는 스튜디오에 수업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 '때'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막힌 타이밍이 낯선 도전의 과정을 쉽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등록하러 처음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때의 그 생경했던 느낌을 기억한다. 내가 지나가면서 보았던 침대는 하나의 기구에 불과했고 의자며 벽에 붙은 스프링이며 색깔까지 다양하게 설치되었던 인테리어, 그리고 그 안에서 운동하던 많은 미국인들. 순간 나에게 맞는 곳인지 두려움부터 일었다. 나가야 하나. 하지만 나가면 어딜 간단 말인가... 다른 걸 찾아볼 의욕은 있고? 아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단 집을 나올 수 있는 걸로 됐다. 한 클래스만 조용히 등록했다. 혼자 무언가를 지속할 의지조차 사라져 버린 나에게 첫 필라테스 수업의 가장 좋았던 점은 누워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침대처럼 생긴 기구 이름은 리포머였고 누워서 쉬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움직이는 것이라는 걸 수업하면서 알게 되었다.
강사는 영어로 열심히 떠들어댔고 온갖 처음 듣는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섞여 갈 길을 찾지 못했다. 다른 운동과는 다르게 내가 누워 있는 기구를 조정도 하고 시키는 대로 변경시킬 줄도 알아야 해서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누워 있는 옆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그대로 따라 했지만 반도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운동이 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각 다르게 생긴 기구가 여러 개 있는데 이 기구로 운동하다 또 중간에 일어나 저 기구로 운동하고 명칭도 조정하는 방식도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스프링들은 또 왜 이렇게 많고 헷갈리는지.. 나는 레드, 옐로, 그린 같은 색깔용어조차 못 알아듣는 영어실력을 가졌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물론 한참 뒤에 같은 미국인들도 처음엔 모든 기구며 용어가 생소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첫 필라테스 수업을 받는 토종한국인에게는 영어 그룹 수업은 당황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것은 수업을 받고 나오는 내 몸이 약간은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원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은 컨디션이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내 몸을 위해서 전신 스트레칭을 하고 나온 그런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못 알아듣는 영어와 상관없이 내 몸은 좋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소파에 누워 있는 것보다 이게 낫다고. 그것이 육아로부터의 한 시간 탈출이든, 스트레칭이든 그 이유가 상관없이 느껴졌다. 마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흐린 먹구름뿐이지만 잠깐 아주 잠깐 비추는 햇살을 느끼며 행복하다고 느꼈달까. 새벽 여섯 시 집을 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기분 좋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에 네 번 레슨권을 등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