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슈타이들 북 컬처: 매직 온 페이퍼'
전시 기간: 24.9.14 ~ 25.2.23
관람 시간: 오전 10시 ~ 오후 7시
'슈타이들 북 컬처: 매직 온 페이퍼'는 작년 하반기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전시인데, 관람 기간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다녀왔습니다. 사전에 전시 관련 정보를 잘 찾아보지 않아서 생각보다 큰 스케일에 좀 놀랐습니다. 전시를 둘러보는 동안에도 '슈타이들의 예술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아직 내 그릇이 작아서 이들의 깊이를 다 담을 순 없겠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이유는 글과 사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책으로 구현해 내는 슈타이들의 마음을 다시금 떠올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해당 글은 바이브 앱의 오디오 가이드를 참고했으며, 작품 순서와 상관없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위주로 작성했습니다.
독일 베를린 마을, 괴팅겐의 골목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처음엔 사진의 6개 건물을 콜라주처럼 이어 붙인 줄 알았습니다. 700년도 넘은 목조 주택과 (왼쪽에서 두 번째) 지어진 지 4년 된 전시장이 (가장 왼쪽) 나란히 붙어있으니까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조 주택은 노벨 문학상 작가의 아카이브 공간이라고 합니다. 오래된 건물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불어넣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슈타이들의 가치관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슈타이들의 책은 많은 예술가들과 함께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특히 테세우스 찬은 전시 포스터 및 이미지 드로잉을 담당한 아트 디렉터이기도 합니다. 전시 포스터 이미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가 선호하는 작업 방식은 '명확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연한 선들이 모여 어떤 실루엣을 만들어내고 결국엔 상상할 수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것. 우연한 순간은 스치면 금방 잊어버리곤 하는데, 과정마저 예술로 여기고 즐기는 그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험'이라는 짐 다인. 그의 예술관은 '즉흥'입니다.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그는 실제로 1년 간 52권의 책을 완성했습니다. 각각의 책에는 그의 취향, 페인팅, 드로잉 등 다양한 생각과 표현이 담겨있습니다. 작품의 설치 또한 즉흥적인 그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아코디언처럼 책을 펼치고 접을 수 있는 사진작가 다야니타 싱의 작품입니다. 친구와의 여행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책의 형식으로 만들어낸 '편지를 보냈다'라는 제목입니다. 요즘의 사진첩이란 주로 핸드폰 폴더 속에 남아있습니다. 방대한 양의 사진을 저장해 놓고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꺼내 보는 일이 적은 것 같습니다. 때로는 리모컨으로 TV 화면을 돌려가며 어떤 프로를 봐야 할지 고민하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반면 책의 형태로 사진 앨범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편집이라는 과정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사진 앨범을 보는 것은 그 사람의 추억과 감정을 더욱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슈타이들의 디테일한 책 제작 과정을 볼 수 있는 코너입니다. 종이의 질감부터 서체, 컬러 등 슈타이들이 인정하는 '완성'이라는 기준은 쉽게 만족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기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겁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하니 벽에 붙은 포스터 하나하나가 모두 예술 작품으로 느껴졌습니다.
슈타이들은 책을 민주적인 예술품의 정점이자,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작품으로 봤습니다. 그의 예술관은 출판업을 시작했을 무렵 앤디 워홀과의 인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작품을 대량 생산했던 앤디 워홀은 '예술은 대중을 위해 존재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이제 막 첫걸음을 땐 불확실한 시기에 서로의 신념과 가치관에 깊게 공감하고 예술관을 공유했을 이들의 관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아티스트와의 협업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의 '팩토리 북'을 관람하는 것도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고가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브랜드에게 팩토리북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브랜드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그들의 경영이념과 제품 철학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팩토리 북을 보고 있으면 그 묵직한 무게만큼의 오랜 역사, 높은 품질을 추구하는 브랜드의 이상이 가볍게 기록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Old mills never die (오래된 공장은 죽지 않는다.)'라는 버켄스탁의 세계관처럼 브랜드가 가진 유산은 그들이 만들어낸 제품처럼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있을 때 전해지는 가치인 것 같습니다.
슈타이들의 출판 철학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전시의 마지막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슈타이들 라이브러리'입니다. 이곳의 책상과 의자, 조명까지 실제 독일의 슈타이들빌에 있는 라이브러리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합니다. 이 공간에서 추구하는 것 역시 다양한 감각을 통해 책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책의 커버, 종이의 질감, 사진의 배열, 사용된 컬러 등 똑같은 책은 찾아볼 수 없는 이곳은 슈타이들이 만들어낸 그야말로 마법의 책장입니다.
요즘 책을 읽으면 내용을 짧게 요약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는데, 독후감의 범위를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표지, 컬러, 질감은 어떤지 잠시 시선을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책을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장에 꽂아둔 책을 보고 '이 책이 좋은 이유'를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어느 영화감독의 자서전의 표지는 누군가의 일기장 같은 질감이어서 좋았고, 표지 하단 감독의 흑백 사진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감독의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물론, 편집자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