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봉명주공'
3살 때부터 살던 집 근처에 대단지 주공아파트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일주일에 3~4번 아파트 단지에 있는 공부방에 갔다.
하교 후 책가방을 메고 공부방으로 향했던 길이 가끔 생각난다.
그곳에 가려면 학교 앞 긴 터널을 먼저 지나야 했는데, 봄이면 장미 덩굴이 예쁘게 폈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 입구 쪽 계단을 오르면 커다란 나무가 이어져 있는 산책로가 있었다.
길 중간에 산으로 향하는 입구가 있어서 주민들과 등산객이 많았다.
여름이면 짙어지는 초록빛과 매미 소리를 꽤 좋아했던 것 같다.
12년 후, 주공아파트 단지엔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내가 좋아했던 숲길은 사라졌다.
30년 넘은 아파트를 허물기 시작했을 때, 나는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펜스 너머 공사장 소음은 한 시대가 저무는 소리였다.
영화 '봉명주공'도 한 시대의 끝을 알리는 소리로 시작했다.
청주의 1세대 주공아파트인 봉명주공의 버드나무가 톱에 베여 쓰러지는 소리였다.
그 나무가 몇 살이었는지, 마을에서 주민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는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영화는 그저 조용히 그 장면을 바라본다.
마치 그곳을 지나던 여행객이 나무가 베이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춘 것처럼.
숨죽이며 보던 그때, 영화는 몇 개월 전 2019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봉명주공 재개발이 확정되어 입주민 이주가 시작되던 때였다.
주민들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함께했던 이웃, 단지를 밝혀주던 나무들과의 이별이었다.
어떤 이는 마을 곳곳을 사진으로 남겼고, 어떤 이는 아파트 식물의 이주를 도왔다.
1980년대 지어진 봉명주공 일반적인 아파트들과 모습이 조금 달랐다.
2층짜리 빌라 단지와 1층짜리 주택 4 가구가 조화를 이루던 모습은 이국적인 연립주택 마을을 연상케했다.
당시 한국의 주택 공사가 프랑스에 수주하여 설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웃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구조, 꽃사과와 벚나무가 피던 단지.
그곳을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여름과 겨울을 지낸 버드나무는 다시 봄을 맞기도 전에 베여나갔다.
큰 나무들은 옮겨심을 수 없었고, 대부분 현장에서 잘려나갔다.
어떤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트럭에 실려 떠났다.
모두 누군가에게 한때 소중한 그늘이 되어주던 나무들이었다.
서른이 되던 해, 옛 동네를 떠나온 이곳은 서울의 또 다른 주공아파트 단지다.
전세로 몇 년 살고 떠나갈 동네지만, 이곳도 언젠가 다른 시대를 맞이하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맞게 되는 변화는 어쩔 수 없지만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건 아쉽다.
봉명주공의 주민들이 단지를 걸으며 사진을 찍던 그 마음처럼, 나도 언젠가 이곳을 떠날 때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다. 한 시대가 저물었을 때 그곳에서 쌓인 기억과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남아 있기를. 빼곡히 들어설 건물들 사이에서 잠시 숨 돌릴 여백의 자리야말로
우리가 이어가야 할 장소의 표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