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언니는 이 말을 싫어한다고 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왜 없지? 이 말 자체가 도망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에 싫다고 한다. 도망치는 것이 때로는 현명한 것이라고도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고.
그러게. 생각해 보면 애초에 어디든 낙원은 없는 것 같다. 아니면 어디든 낙원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낙원을 무엇이라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결국 도망을 치든 계속 버티든 힘든 건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도망친 곳에도 낙원은 없다는 말이 생긴 것이고.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는 건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어딜 가나 힘듦은 존재하고 아무런 힘듦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는 그런 당연한 진리 때문에 저런 말이 생긴 걸까?
그래도 도망을 친다는 것은, 지금 느끼는 힘듦에서 벗어난다는 것에 집중했을 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힘듦의 종류는 모두 다르고, 힘듦의 크기도 인간마다 느끼는 게 천차만별이니까. 어딜 가든 힘듦이 있어도, 나에게 100의 아픔을 주는 힘듦과 10의 아픔을 주는 힘듦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100에서 10으로 도망갈 것이다. 10의 아픔이 있기에 낙원이 아닐까? 아니. 난 10의 아픔 정도는 도망친 이상 견뎌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힘들어하던 100의 아픔이 없다는 것에 행복을 느낄 것이다. 비로소 낙원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도망은 기꺼이 칠 수 있다. 대신 결과는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낙원은 스스로 만들어내기 나름이다. 그 어떤 곳도 낙원이 될 수 있고 지옥이 될 수 있는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