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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ventud Dec 20. 2015

괜찮아, 나도 그래

저는 당신 덕에 위로를 받고, 당신은 제 덕에 용기를 얻습니다.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서 갑니다.
후임 교육이 끝날 때까지 일하고 퇴사하겠습니다.


결코 일에 자신이 없거나 하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사람이 싫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운 좋게도 직장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비난보다 감싸주며 이끌어 주시던 분들이셨다.

무엇보다 나는 일을 사랑했던 사람이고, 일을 하지 않는 나를 상상할 수가 없다.


다만, 눈 가린 말처럼 맹목적으로 가고 있는 내 인생을 더 멀리 더 의미 있게 가기 위해선 지금까지를 돌아보고

앞으로를 계획할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겐 '여행'이었다. 덧붙이자면 잃어버린 내 이름을 찾고 싶었다. **회사의 누구누구로 사는 동안 나는 나를 잃었다. 이유 없는 공허감이 있었다. 퇴근 후 밥 먹다 허기진 마음을 붙들고 어이없이 울었던 나날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다시 일을 하더라도 나란 사람이 중심에 서야 비로소 더 멀리 열정을 갖고 뛸 수 있을 거 같다.


얼마나 마음대로 뛰놀고 싶을까.  Sevilla, Spain.


내 결정이 옳은 결정이었다는 건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여행길에 행복하고 의미 있는 순간순간이 증명해 주었다.


얼마 전 보육교사로 일하고 있는 정말 아끼는 친구와 오랜만에 긴 통화를 했다.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것도 아닌데 목소리 만으로 그녀가 꽤나 지쳐있음이 느껴졌다. 지난번 만났을 때 비염 때문에 콧물이 계속 나고 목 뒤로 넘어가기까지 한다며 휴지를 손에서 놓지 못했는데 얼마 전에 한의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왔다고 한다. 10년을 넘게 알고 지냈지만 비염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최근에 생겼다고 하는데 한의사가 그녀의 증상 얘길 듣더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냐고 물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증상의 심각성을 봐서는 스트레스도 발병 원인 일 수 있다며 보약 처방과 하루 30분 명상을 권유받았다고 말했다.


방정리만 필요한게 아니다. 마음도 때로 정리정돈이 필요하다.


발병원인 역시 의외였다. 스트레스. 평소에 굉장히 밝고 긍정적인 성격의 친구였고 더군다나 아이를 너무 좋아해서 만나면 맡고 있는 아이들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던 그녀였다. 아무리 좋아해도 그것이 일이 되는 순간 싫어진다고도 하는데 적어도 그녀는 예외였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일을 일찍 시작했고 중간에 한번 몸이 너무 지쳐 일을 쉬고자 나왔다가 원장님의 권유로 한 달 만에 다시 복직하긴 했었다. 지친 목소리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친구와 얘기를 하며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파리에서 만났던 J.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그녀는 키도 크고 늘씬하며 또렷한 이목구비로 보자마자 눈에 확 들어왔다. 그날은 다른 나라로 옮기는 날이라 씻지도 않은 얼굴로 머리를 질끈 묶고 노트북 앞에 앉아 도착국의 정보를 찾으며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방으로 들어온 J가 다들 구경하러 나갔는데 왜 아직 안 나가셨냐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의 일정을 얘기하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녀가 여행을 오게 된 계기를 듣게 됐다는 말이 맞겠다.


여행이라는 게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힘이 있어서 인지 처음 본 나에게 J는 자신의 이야기를 서스름 없이 털어놓았다. J 역시 워커홀릭으로 3-4년을 일에 빠져 살았는데, 한창 바쁠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어지간히 힘든 일에도 눈물을 보인적이 없었다고 한다. 잘 살아왔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보이기 위해 더 씩씩하게 지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거짓말처럼 J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온몸의 뼈 마디마디가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병원을 가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더 답답했고 심적으로도 힘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다 아픔의 원인을 찾기 위해 의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됐는데 한동안은 우느라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고 했다. 직장생활에 누군들 스트레스가 없겠냐마는 J는 감정을 속인 채 표출 조차 하지 않았고 그것이 쌓이다 보니 몸으로 반응이 온 듯했다. 그렇게 자기가 힘든 줄도 몰랐다고 한다.


내 속엔 내가 모르는 내가 많다. Sevilla, Spain.


자기의 감정도 모르고 살았다는 그 말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고 나니 정말 중요한 게 뭔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며 한 번도 한적 없는 혼자 여행을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여행 선언에 가족들 모두 몸도 안 좋은데 어딜 가냐며 반대했다. 걱정을 뒤로하고 떠나온 여행에서 매일매일 한 보따리 싸온 약을 먹어야 하지만 그래도 오길 잘했다며 씩씩하게 웃어 보이는 J에게서 반짝이는 뭔가가 느껴졌다. 적어도 그녀의 내일은 지나온 어제보다 훨씬 가치 있을 것 같다.


고마웠다. 처음 보는 내게 마음을 열어줘서.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내게 '잘한 선택'이라고  말해준 것 같아서. 그리고 나 역시 친구에게 내가 느낀 것을 나눌 의무가 있었다.


"내년 초에 시간 맞춰서 같이 제주도 가자. 나만 믿고 따라와. 너는 쉼이 필요해"


약 먹은 병아리 마냥 힘없던 목소리가 내 제안을 듣자마자 갑자기 힘이 솟았다. "정말? 진짜지? 가자 꼭 가자~ 너무 가고 싶어!!" 꼬마처럼 좋아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그래도 다행이었다. 지침을 위로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 돌아온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감사했다.






퇴직 선언 이후 뜻밖의 제안과 주변의 반응은 오히려 나를 놀라게 하였다.


먼저 나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상사. 그 순간만큼은 상사가 아닌 조금 더 살아본 인생선배로서 현실의 어려움을 하나하나 짚어주셨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막상 나가면 당장은 좋겠지만 다시 이 조건, 이 포지션의 일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고 새로운 곳에 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 맞는 말씀이었다. 애써 설득했던 내 마음이 조금은 흔들렸지만 그래도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다시 나를 부르셨다.


내가 걸어가면 길이되고,


"그래. 여행, 다녀와. 나도 생각해 보니 너 나이 때는 혼란스러웠어. 이 길이 맞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답답하고 막막했어. 그동안 휴일도 남들처럼 다 쉬지 못하고 고생했어. 한 달 무급 휴가 줄게. 가서 그렇게 보고 싶고, 경험하고 싶었던 것들 다 하고 와. 대신 돌아와야 해. 여행이 너무 길어도 의미가 없어. 여행 때문에 지금까지의 경력을 무너뜨리긴 너무 아까워. 그리고 내가 보기엔 이 일 너랑 잘 맞아. 이번엔 내 말 들어. 알았지?"


생각지 못한 제안에 당장 뭐라고 결정 내리기 어려웠다. 여행과 일의 갈림길에서 "모 아니면 도"식의 선택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이 사실이기에 선뜻 다 내려놓겠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바쁘지 않은 시기와 맞물렸고 20일을 더 붙여 다녀오기로 얘기가  마무리됐다. 이런 걸 바라고 일했던 것은 아니지만 황금연휴를 반납한 보람이 있었다.

 


그날부터 본격적인 여행 준비가 시작됐다. 남들은 적어도 2-3달 전에 준비한다는 유럽여행을 2주 만에 속성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내가 생각해도 웬만한 여행사 직원 울고 갈 정도의 초인적인 힘이 발휘됐다. 역시 사람이 코너에 몰리면 자기도 모르는 능력이 발휘되는 것 같다.


이게 뭐라고. 이 화면 하나에 뭉클했던지.



이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릴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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