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ventud Dec 25. 2015

인생의 심부름꾼 되지 않기를

살아지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것,

혼자 여행이 무서운 당신에게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 두려운 나에게

이탈리아 부라노섬에서 노을 지는 풍경이 아름답다는 본 섬 다리로 가기 위해 수상버스를 탔다.

여행의 어느 순간부터 나는 굳이 모든 행선지의 역 이름이나 버스번호를 외우진 않는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니까"


그날도 어김없이 뻔뻔함으로 무장하고 여행객들에게 둘러싸인 선원에게 내릴 역을 물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을 크게 뜬 어떤 여자가 그 선원이 아닌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그 애절한 표정과 다급함에 질문도 다 듣기 전에 대답할 뻔했다.

뭐라도 도와야 할거 같아서.


한국인이 맞다는 내 말을 듣자 얼굴이 금세 풀린다. 아마도 다행이라고 생각한 거 같다. 통성명도 안 했는데 산타 마르코 광장에 어떻게 가는지 아냐고 물어왔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선원에게 다시 물었다. 그는 이렇게 가면 조금 돌아가지만 풍경을 보며 갈 수 있고, 저렇게 가면 한번 갈아타야 하지만 거리는 가장 짧다며 친절하게 알려줬다. 고마워서 "내가 질문이 좀 많지, 네가 너무 친절해서 계속 물어보고 싶어 그런 거야~!"라고 칭찬 섞인 농담을 던졌더니 "나 아무나한테 친절하지 않아"라는 대답으로 받아친다. 하하 호호하고 있는 내 모습을 멍하니 보던 그 여자분께 들은 대로 알려드렸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베니스의 첫인상



다소 거친 물살 위로 종이짝 같은 배들이 아무렇지 않게



 혹시 오늘 저녁에 어디 구경하실 거예요? 저기.. 괜찮으면 같이 가도 돼요?
방해 안되게 그냥 뒤에서 따라만 갈게요.



잘못 들은 건가.. 같이 가는 게 아니따라오신다는..? 나는 급하게 손을 휘휘 저으며, "방해는요~ 괜찮으시면 같이 가요! 저도 말동무 생기고 좋죠. 저는 이렇게 사람 사귀는 거 좋아해요" 그랬더니 미안하고 고마운 표정을 섞웃어 보인다.  


배가 어느 역에 정박하자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같이 내려 노을이 보이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볼살 쏙 빠진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그녀는 K. 30대 중반은 되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첫 유럽여행에다 혼자 여행도 처음이라고 했다. 이렇게 긴장을 잔뜩 한 채로 어떻게 혼자 나오게 됐을까. 게다가 이미 떠나온 지 일주일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여자의 여행 계기가 궁금하다.


"어떻게 여행을 오시게 됐어요?"


K는 여행 오기 직전까지 뭇사람들이 선망하는 회사에서 꽤 오랜 기간 일을 했다. 그래도 좋은 조건의 회사인데 어떻게 그렇게 과감하게 결단을 하셨냐는 질문에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 너무너무 지겨워서요."


그녀의 지친 표정이 그 한마디 이상을 대변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원래는 그룹 투어를 신청했는데 어떤 이유로 그 투어가 예정에 없이 계속 미뤄졌다. 이를 계기로 '어린 친구들도 가는 유럽여행인데 나라고 못하겠어'라는 생각으로 혼자 여행을 저지르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와서 보니 그 친구들이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갖 걱정 투성이란다. '길을 잃으면 어쩌지?' '이 성당을 못 찾아 가면 어떡하지?' '길을 물었다가 말이 안 통하면 어떡하지?' 그녀를 걱정시키는 요소는 도처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정말 내가 정말 독특하다는 표정으로 "왜 이렇게 여유가 있어요? 무섭지 않아요?"한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오래전 마카오에서 첫날밤이 그랬다. 이름만 호텔인 뒷골목 모텔방 작은 침대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할 때 무서웠다. 누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올 것만 같아서. 물론 지금은 어딜 가지 못해 안달이다.

"저도 처음이라 길 잃은 적 있지만 결국 물으며 가다 보면 찾아지더라고요. 간혹 말 안 통하거나 불친절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기꺼이 돕고 싶어 해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괜찮아요."


나이 잊고 친구하죠!


생각해보면 나는 모르는 게 많아서, 혼자여서 여행길에서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데 있어 묻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게 또 있을까?

나는 도움이 필요한데 당신이 도와줄 수 있는 정도이고, 그래 준다면 나는 당신에게 너무 고마울 거 같아요.

도움받아서 기쁘고 도와줄 수 있어서 또 기쁜 것, 그것이 인간관계의 시작이 아닐까.



붉으스름 노을이 하늘에 스며 올 때 즈음 다시 수상버스에  올라탔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던 배 위로 책에서 본듯한 다리가 지나갔다. 나는 무심코 "아, 지붕 덮인 돌다리가 리알토 다리인가 봐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나보고 여기 내려서 보지 않냐고, 오늘 하루 동안 어디 어디 다녀왔냐고 묻는다.



 "주변에 작은 섬 걷왔어요"


그녀의 예상과 빗나간 내 대답에 이건 안 봤어요? 저건 안 봤어요? 귀에 익은 베니스 대표 관광지들을 열거했다. '이걸 다 안 보고 간다고?'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그 질문 끝에 든 생각은 K의 남은 여행길이 조금은 달랐으면 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기억에 남는 여행지 있어요?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어디서 어떤 기분을 느꼈어요?"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여행을 숙제처럼 하고 있는 거 같아요. 우리는 흔히 여행을 오면 내가 얼마를 주고 여기 왔으니 유명한 건 다 보고 가야 한다라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하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러면 나중에 진짜 기억에 남는 게 없어요. 그냥 늘 쫓기듯 이동한 기억밖엔. 지금이라도 조금 다른 마음가짐으로 해 보는 건 어때요?


일단 다 볼 필요는 없어요. 유명한 관광지라고 해서 나에게도 꼭 좋으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냥 어딘가를 갔는데 거기가 좋으면 반나절 아니면 하루 종일 거기 머물러도 돼요. 충분히 좋은 기분을 느끼고  그동안의 나를 돌아보고 그 시간에 흠뻑 빠져보는 거예요. 나중엔 내가 뭘 느꼈냐가 중요하지 어디에 갔느냐가 중요하진 않아요. 그러니까 결국 기억에 남는 건 그 건물이 몇 층인지 무슨 양식의 건물인지 보다 '그날의 날씨가 어땠고, 내 기분이 어땠고, 그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더라구요. "


뭔가에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하는 K를 보며 어디선가 본 글귀가 생각난다.

 


당신은 인생을 심부름처럼 왔다가는 가, 여행하듯 음미하고 있는가?


나는 그랬다. 스페인에서는 뜨거운 태양을 한번 흠뻑 느껴봐야지, 노천 테이블에 앉아 샹그리아(저렴한 와인에 각종 과일을 넣어마시는 스페인 대표 음료) 마시면서 밤새 이야기를 나눠야지, 플라멩코의 뜨거운 무대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와야지. 파리에선 에펠탑이 보이는 잔디밭에 누워 책 한 권 읽다오자 커피 한잔도 좋고.

두브로브니크에선 언젠가 사진으로 보았던 구 시가지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마음에 가득 담아 오자. 나머지는 덤인 것이다. 꼭 무얼 봐야 하고 꼭 다 들러야 하고 이런 마음은 없었다. 여행을 와서까지 나 자신을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속는 셈 치고 내일 하루만 음미하듯 여행해봐요, 마음이 머무르는 곳에 발도 머무르는 거예요."


아직 예고편에 불과하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삶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듯이 우리는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 실수하거나 실패할 수 있다.

결론은,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이어지듯이.

때로 좌절할 때도,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도, 내일이라고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도

인생의 훈풍이 한번 휙 불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순간도 날아가 버리곤 한다.



꽃보다 누나에서 윤여정님의 말이 정말 사이다스럽다. 단어 그대로 속이 시원하다.

"내년에 어떨 거 같으세요? (계획?)"

"나도 몰라, 나도 67세 아직 안 살아봤어.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67세는 처음인데."



낯선 것 투성인 여행길에서 길을 묻듯이,

온통 물음표 투성인 인생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다른 사람 아닌 나에게.

'괜찮지?'

'너는 뭘 할 때 행복해?'

'내년엔 뭘 하고 싶어?'

'언제 힘이 들어?'

'어떻게 해야 이 어려움을 극복할까?'

'내가 너 믿는 거 알지?'


그 과정에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강연을 듣거나 책을 읽고, 여행을 나서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음미하는 것.

슬픈 일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영속적이지 않고, 기쁜 일은 곰곰이 생각할수록 감사한 것.



이 글을 보는 당신의 인생도 휘리릭 지나가 버리는 일장춘몽이 아닌 야무지게 하루하루 채워가는 인생이기를.




마지막으로 K가 며칠 후 내게 남긴 카톡 메시지.

"덕분에 그다음 여행지인 피렌체부터 정말 이상할 정도로 한결 편해지면서 마음으로 느끼고 순간을 즐기려고 노력했던 거 같아. 정말 고마워!"


내가 고맙다. 내 여행길에 지나치지 않고 마주쳐 줘서.

매거진의 이전글 괜찮아, 나도 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