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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Nov 03. 2023

잃어버린 베란다 영토 되찾기

진정한 정리정돈을 배우는 중

 계절이 바뀌면 묘수 없는 정리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날이 제법 쌀쌀해졌는데도 옷장에 걸린 옷은 아직 여름 의복뿐이었. 자주 입던 간절기 옷이라도 몇 벌 찾고 싶은데 도대체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고 모든 옷꾸러미를 뒤지자니 머리가 지끈.

 미니멀리스트 작가가 쓴 책을 읽던 오후였다. 휑하다 싶을 정도로 단조로운 베란다 사진에 책장을 넘기던 손 멈다. 사진 자료를 위해 더욱 말끔히 비워놓은 상태 촬영했겠지만 어쨌거나 우리 집 베란다에 비하면 팔 차선 도로와도 같은 광경이었다.  베란다를 만들어 보겠다고 두 차례 정도 난타전을 치렀으나 아직 갈 길이 먼 상태다. '나는 이런 집에 살지 말라는 법이 있나.' 차분한 마음으로 차츰 정리해 나가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다음 장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곤 다시 앞장으로 돌아와 여백이 가득한 베란다 사진을 마주했다.


 독서등과 서재의 불을 모두 끄고 베란다로 뛰어들었다.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두 팔을 걷어붙이고 그간 외면판도라의 상자를 하나둘씩 끄집어냈다. 이쪽을 뚫으면 저쪽에 산이 생기고 저쪽을 뚫으면 이쪽이 도로 막혔다. 물건이 지뢰처럼 밟히는 하나의 거대한 비무장지대가 형성 됐고 거실로 건너갈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욕망에 갇힌 내 꼴이 스스로도 쌤통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불투명한 수납함과 적재된 물건이었다. 불투명 수납함은 겉으로 보기엔 깔끔하지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금방 알 수가 없어 좀체 손이 가지 않았다. 위아래로 쌓인 수납 스툴을 하나씩 바닥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어보는 일도 여간 번거로웠다. 어째 점점 더 난장판이 돼가는 것 같다? 내 힘으론 어림도 없을 것 같아 그만둘까 고민했지만 원상복구라도 해야 된다생각에 막노동을 강행했다.


 번들로 구매한 세제와 차량 청소 용품, 거실 청소 도구, 불편해서 신지 않았던 우리 부부의 신발들이 대거 발견됐다. 당장에 버려야 할 옷가지가 들었을 것으로 예상던 분홍색 더스트 백 안에는 몇 번 입지도 않은 때깔 좋은 옷들이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 반 허무한 마음 반이었다. 소중히 여겼던 옷이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니 까맣게 잊어버렸고 그들 없이도 여태 너무나 잘 지내왔. 커다란 비닐봉지를 두 장 펼쳐놓고 버리고 치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90리터를 담을 수 있는 특대형 봉투가 꽉꽉 들어찼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을 들추자 화석처럼 굳은 벌레 몇 마리 나왔다. 오금이 저려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벌레는 귀신보다 더 무섭다. 고무장갑을 끼고 못 쓰는 걸레를 가져와 눈물을 머금은 채로 벌레를 쓸었건만 몸통과 다리가 분리되는 꼴까지 보게 돼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집을 잘 돌보고 구석구석 정리할 능력도 없으면서 맥시멀리스트로 산 죄를 달게 받는 기분이었다. 베란다에 구르는 작은 먼지 뭉텅이마저도 모두 벌레로 보여서 어찌나 공포스럽던지. 조만간 베란다를 대거 정리하고 나면 다시는 물건으로 함부로 채우지 않겠노라고 다짐 또 다짐했다.  


 언젠간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장판과 타일과 벽지는 도무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부피가 컸다. 맨손으로 정리하다가 타일에 손이 깔려서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미니멀라이프 두 번 했다간 내 몸뚱이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퇴근한 남편에게 오 년 넘게 베란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인테리어 물품들을 도대체 언제까지 가지고 살아야 할 자문을 구했다. 남편 님께서는 그냥 내버려 두면 언젠간 필요할 날이 올 거라고 말씀하셨다. 정리하다가 손도 다칠 뻔했고, 인테리어 물품 부피너무 크고, 햇빛을 많이 받아 쓸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가 남 이야기하듯 "그럼 갖다 버려"라고 했다. "내가? 내가!!!!??" 씩씩. 살짝 분노 조절 경보기가 울릴 뻔했다. 와이프가 맥시멀리스트로 지내든 미니멀리스트를 자처하든 존중하는 그의 아량을 높이 샀건만 관 내지 귀차니즘었군.


 어쩌다 한 번을 위해 보관했던 많은 물건들은 른 시일 내에 적극적으로 처분할 참이다. 무료 나눔, 판매, 버리기 등의 갖가지 방법으로. 베란다의 묵은 짐을 정리하며 수납이 부족한 집의 한계를 다시 한번 절실히 느꼈다. 내부에 수납공간이 충분치 않다 보니 사용 빈도가 높지 않은 제품들이 베란다로 대거 몰렸다. 게다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수납함을 구매했더니 구색이 맞지 않는 것은 물론 공간을 제각각 차지하는 부분이 가장 아쉬웠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인정하기 싫지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 묶음으로 구매한 물건들, 나름 알뜰하게 살림을 하겠다고 한 번에 쟁여 둔 제품들을 보니 처리하는 게 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환경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릇 세제를 친환경 설거지 비누로 대체한 지 좀 되었고, 방향제와 디퓨저, 건조기 향기 시트 등도 더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반기지 않는 물건들을 나누는 것도 영 마음이 쓰이고 누군가에게 드리면서도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요즘엔 가까운 마트에 가서 하나씩 필요한 만큼만 물건을 사는 취미를 붙이고 있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던 심산이 오히려 많은 비용과 공간과 수고를 지불하게 만들었다. 베란다 정리를 하면서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제법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게 됐다.


 뭔가 필요해지거든 구매 버튼을 누르기 앞서 우리 집 베란다 시장으로 나가야겠다. 먼지를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저기를 모두 뒤져서라도 불필요한 구매를 막을 셈이다. 물건을 찾는 김에 또 조금씩 비워내면서 여유로운 공간 설계해야지. 갈색 수납 수틀 함에서 발견한 파란색 유리 세정제 다섯 통은 꽤나 신선한 충격 가했다. 선글라스도 잘 안 닦는 주제에 유리 세정제는 왜 또 평생쓰고도 남을 만큼 구비했 말인가.


 베란다에 방치된 각종 청소도구들은 내 집을 깨끗하게 하기는커녕 정리를 가로막는 방해꾼이 돼버린 지 오래다. 청소는 장비발이라는 말 따위 앞으론 영영 믿지 않기로 했다. 깨끗한 집은 물건이 없어야 가능하고 물건이 없는 집은 비싼 도구가 없어도 말끔히 청소할 수 있다. 아주 조금은 빛을 보게 된 베란다 이야기를 맺으며 수납 수툴 마저도 필요치 않을 유로운 베란다를 상상해 본. 늘의 고된 작업 끝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정리는 결코 정리정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제 또 한 번의 거사가 남았다. 다음번에는 내 키만큼 쌓인 옷을 처리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전해드릴 계획이다.

란다베 씨, 결국 승리는 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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