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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Nov 11. 2023

로맨스 무첨가 9주년 파티

기념일 외전

 애플리케이션 알람이 말했다. 까맣게 잊었겠지만 오늘은 너희 부부기념일이라고. 커플 창립 9주년을 맞아 축하한다는 인사를 간결히 나누고 제각기 바쁜 하루를 열었다. '오늘은 꽃 한 송이라도 받아 볼 수 있으려나?'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남편에게 눈치를 좀 끼얹어야겠다는 취지로 메시지 하나를 전송했다. "난 오늘 9주년 기념으로 김밥이나 한 줄 사 먹어야겠다..." 눈치 마이너스 백 단인 남편이 신속하게 답을 주었다. "떡볶이도 같이 먹어" 이렇게나 다정하고 매운맛의 답장을 받을 줄이야.

 "뭔 떡볶이야 참나!" 어이없어하는 아내에게 눈치 없는 남편이 강수를 뒀다. 단골 밥집 메뉴 떡볶이가 개시됐다는 걸 알아냈단다. 저기요. 떡볶이 생각 없다니깐요? 작은 기대나마 거둬들이기로 결단한 아내가 퇴근 후에 달리기나 하러 가자고 말하자 그가 신속히 답했다. "아. 오늘 달리기 날이지." 아니. 저기... 달리기 날은 또 뭡니까? 오늘은 우리의 9주년 기념일이라니깐요.


 사귄 지 천 일이 되던 날, 그날도 이와 비슷한 대화를 나눴다. 장미꽃 한 다발을 기대했던 나를 텅 빈 손으로 마중 나온 남자친구였던 그. 손수 준비한 도시락에 반려견까지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갔던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물었다. "오늘 천 일인데 왜 빈 손이야? 꽃은 어디에 숨겼어? 장미꽃 한 송이라도 들고 나왔어야지." 멋쩍게 웃으며 그가 답했다. "아! 내가 이따가 장미꽃 한 송이 사 줄게." 어휴.  또 한 송이씩이나. 시든 꽃 한 송이조차 없는 기념일을 보내며 두 번 다시 그에게 기념일 선물이나 서프라이즈 파티 같은 건 기대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럼에도 늘 꽃 집의 위치를 몰라서, 오는 길이 밀려서, 꽃 가게가 문을 닫아서 아무것도 사지 못했변명을 들을 때면 왠지 모를 섭섭함과 분노가 치민다. 길치인 나도 꽃집은 잘도 찾겠던데!  


 기념일에 커플끼리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받으며 서로가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하라는 조언을 적잖이 들었다. 꽃 한 송이조차 받지 못하고 기념일을 넘겨버리면 딱 그 정도의 존재가 될까 봐 조바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 역시 기념일을 정성스레 챙기고 이벤트를 즐기는 유형의 사람이 아닌지라 무턱대고 특별한 대우를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9주년이 달리기 날(?)로 전락하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기념일마다 커다란 꽃다발에 고급스러운 선물을 받는 주변 사람들을 볼 때면 '나도 나도!' 하는 치기가 올라왔다. 그런데 남의 가정사라는 게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경우가 많았고 평소에도 기념일처럼 멋들어지게 사는 사람들은 거의 전무후무했다. 기념일에만 반짝하고 행복할 바엔 하고 많은 평범한 날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달갑게 받아들인다. 화려한 꽃다발과 비싼 선물이 필요 없(다고 믿고 싶)을 만큼 일 년 내내 제법 즐거운 추억과 대화와 오가는 우리 가정. 여기서 더 바라는 것은 과욕이리라.


 우천으로 인해 달리기가 취소되고 달리기 날은 비로소 9주년 기념 외식 날이 되었다. 정시에 퇴근한 남편과 함께 반려견 동반 식당으로 갔다. 담백한 스테이크와 이색적인 멕시칸 음식을 먹었다. 옆에 있어도 분리불안이 심한 푸들 님은 일 분에 한 번씩 내 무릎 위로 뛰어 올라왔다. 천방지축 오두방정 자두 덕분에 전쟁을 치르며 식사했더니 진이 다 빠졌다. 다 식어 버린 저녁 식사를 서둘러 해치우고 게임 도구를 파는 매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여보가 맛있는 저녁 사 줬으니까 내가 새로 나온 게임 하나 사줄게." 아내가 게임 CD를 사 준다는 것은 게임을 하는 시간 동안 자유를 보장해 주겠다는 의미이므로 그야말로 통 큰 선물이 되시겠다. 남편은 따로 선물도 못  줬으니 게임 CD는 제 돈으로 사겠다며 이번엔 꽤나 눈치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막상 계산대 앞으로 가서는 본인이 자두를 안고 있어서 결제하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란다. 아내는 엉겁결에 오만 원을 결제하고서 아리송한 기분으로 매장을 나왔다. 또 한방 먹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용과 같이' 외전 '이름을 지운 자'라는 게임 CD를 얻은 편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빨간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아오"를 외치며 초조한 듯이 운전하는 에게 진정하라는 경고를 날렸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거실 불까지 모두 끄고 '이름을 지운 자'라는 게임에 몰두하는 나의 짝꿍. 아내는 그 게임 CD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다. '9주년을 지운 놈' 송 가 장녀와 남 가 차남의 커플 창립 9주년은 이렇게나 행복하고 바쁘게 저물어 버렸다.

9주년은 달리기 날 쁘라쓰 약국 심부름 하는 날...^^♡
급하게 쓰지 말고 생각을 좀 하고 쓰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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