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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Jan 06. 2024

프로의 영역 사내연애

안 하길 잘했습니다

이십 대 초반에 찍었던 사진을 보니 추억이 방울방울 되살아니다. 도전 정신이 강했던 저는 하고 싶은 건 모두 해 보자는 주의였죠. 바쁜 이십대로 지냈던 만큼 다양한 직장과 개성 넘치는 사람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론 늘 방긋 웃으며 텔레토비 동산의 해님 같은 얼굴을 달고 살았던 제 속은 실은 순두부처럼 연약했니다. 부족함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힘에 부칠 때면 책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회사 생활의 꿀팁을 얻기 위해 다양한 지침서를 읽었는데 그중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조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사내 연애를 하지 마라."

회사 생활을 가장 재밌게 하는 방법도, 가장 쉽게 망치는 도 사내 연애라고 했던가요. 교과서적인 성향이 짙은 저는  조언을 가슴에 새기고 사내 연애를 지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떤 작가 선배님의 조언 덕분에 사내연애는 저만의 금기사항이 되었습니다. '일은 회사에서, 사랑은 바깥에서.'


그런데 희한하게도 별 볼 일 없는 제 추파를 던지는 남성들이 많았습니다.

"일 끝나고 뭐해요? 영화 보러 갈래요?"

"너무 피곤한데요. 집에 빨리 가야 해요."


"주말에 뭐해요?"

"주말엔 교회 가요."


"남자친구 있어요?"

"저요? 왜요?"

  

글로 쓰니 꽤나 철벽을 친 여성처럼 보이지만 완곡하게 거절하며 회피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제가 가진 대화 습관에 따라 눈을 마주치며 명랑하게 대답했기에 거절이 거절처럼 가닿지 않았을지도 모니다. 직접적이고 반복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저만의 금기사항을 깰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때문에 직장 동료를 이성으로 보지 았았고 사내 연애는 제게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최대의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초봄의 선선한 저녁 회식 자리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과장님, 팀장님, 동료들이 골고루 섞여 있는 술자리였는데 제 왼쪽 바로 옆에는 매우 훈남인 J대리님이 앉았습니다. 그는 늘 말수가 적었습니다. 제가 아는 건 그가 훤칠한 키에 희고 깨끗한 피부를 가졌다는 것, 검은색 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이 전부였죠. 그날따라 더 말수가 적었던 대리님은 시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돋보였습니다.


신나게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선배님들이 흥미롭다는 듯 제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쩜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그렇게 취한 사람처럼 잘 노냐?" 알코올 해독 능력이 전혀 없는 저는 술을 안 마신다는 이유로 미운털이 박힐까 봐 선배님들의 소지품을 잘 챙겨드렸고 경청하며 대화에 임했습니다. 분위기도 곧잘 띄웠죠. 회식도 일의 연장선이니까요.

"저는 원래 술 안 마셔도 잘 놀아요." 웃으며 대답하자 선배님 한 분이 "좋다, 좋아." 하고 짧은 응원을 보내 주셨습니다. 덕분에 감사함과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대리님이 소주잔을 비우며 나직이 한 마디를 뱉었습니다.

"OO 씨 진짜 귀엽지 않아요?" 응? 뭐라?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뜬금없는 대리님의 발언에 주목했습니다.

"너무 귀엽잖아요."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인 채 웃으며 저를 내려다보는 대리님.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표정과 행동에 일동 얼음이 되었습니다.

'저... 저요...!? 그러니까 오빠가... 아니 대리님이 저를 그렇게 생각해 왔던 거군요.' 그의 플러팅이 저를 관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너희 무슨 사이야? 수상하다." 그러게요. 대리님의 눈빛 수상한 거 맞죠?

"뭘 그렇게 대놓고 고백을 하냐." 다들 가만있어 보세요. 저 지금 살짝 설렜거든요?

"어머어머. 둘이 뭐야? 너희 사내 연애하는 거 아니지?." 여자 상사들의 추임새에 오빠로 보일 뻔했던 그의 신분이 곧장 직장 선배님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가까이에 있을 때마다 흥미롭게 지켜보는 눈들, 일로 대화를 나눌 때에도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따갑게 지켜보는 시선에 저절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깥에서 만났다 해도 한 번 더 시선이 향할 정도로 훈남인 데다가 제 이상형에도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사내 연애의 길은 너무나 험준했습니다.


당시의 회사는 특히나 말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 짧은 사건을 시작으로 우리의 관계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니다. 평소에 대리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상사는 전보다 눈에 띄게 날카롭게 굴었습니다.

저는 일과 사랑을 잘 분리할 수 있는 프로가 아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감정에 충실하고 동요가 큰 사람이었죠. 사내 연애를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로써 충분했습니다.

대리님의 표정과 짧은 한 마디는 어떤 메시지보다도 강력하게 와닿았지만 말입니.

여태껏 제게 던져진 이성들의 추파는 부담과 실례에 지나지 않았습니. 플러팅기술로 하는 게 아니라 외모로 하는 것이라는 속설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이상형에 부합하는 대리님의 행동에 여태 받을 수 없었던 설렘을 느꼈습니다.


만일 선배 작가님의 책에서 사내 연애를 하지 말라는 조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도 그에게 관심을 표현했을 것입니다. 이미 끝이 보이는 시작이라는 걸 알면서도요. 그랬더라 사내 연애에 대해 훨씬 더 복잡하고 긴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깜냥도 안 되면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하지 않았던 저의 결정이 옳았습니다. 사내 연애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의 영역입니다.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회사가 아니라 일터 밖에서 사랑을 찾. 그런데 설령 회사를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놓치기 싫은 사람을 만났다면? 서로 간에 괜찮은 사람이라는 신과 신뢰가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노 결재 직진입니다!

유튜브 너덜트: 사내연애 '아무도 모를 거야'편 (너덜트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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