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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Jan 03. 2024

가슴이 뛰지 않는 연애에 대하여

두근거림보다 중요한 것들

우리의 모습이 각기 다르듯 사랑이 시작되는 모양새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랑은 가슴에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찾아오고, 어떤 사랑은 은은한 잔향처럼 스미기도 합니다. 코를 찌르는 향기는 강력하게 이목을 사로잡지만 금방 피로감을 줍니다. 반면 자연스럽고 편안한 향기는 오래 곁에 두기 좋습니다. Y를 알기 전의 저는 늘 전자에만 초점을 두고 살았습니다.

 학창 시절에 귀여니 작가가 쓴 연애 소설을 읽으며 사랑의 판타지를 키웠니다. '그놈은 멋있었다', '늑대의 유혹' 등의 책은 뭇 청소년들의 윤기 없는 정서에 특별한 사랑을 갈망하는 소나기를 내려 준 소설이죠. 연애 소설 속의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처음 만났던 날, 아침부터 이유도 없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는 글을 보고서 어찌나 설레던지. 부끄럽지만 그런 만남을 꿈꿨음을 고백합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썸을 타기 전의 Y와 저는 알음알음 인사 정도만 하고 지내던 동네 친구였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늦여름 어느 저녁에 친구들과 한데 섞여 친목 모임을 가졌니다. 마주 앉아 웃고 떠드는 사이에 우린 조금 더 가까워졌고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한 번의 모임 후로 Y는 매우 적극적으로 제게 다가와 주었습니다. “오늘 고마웠어.”라는 메시지에 그는 “다음에 또 만나 줘.” 하며 귀여운 애정공세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와 만나면 재미있고 편안했습니다. 반면 Y는 한껏 긴장해서 제 두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습니다. 제법 시간이 지나도 손을 떨며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Y를 보며 놀랍고 고맙고 살짝 걱정도 되었습니다. 나도 함께 두근두근 떨리고 긴장 돼야 하는데 그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 속내가 무거웠습니다.


시작되는 사랑에는 무조건 불편할 만큼의 두근거림이 수반돼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친구가 아닌 연인 사이로 발전할 수 있을까.' 남녀의 설렘은 억지로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기에 복잡한 마음과 동시에 조바심이 들었습니다.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 그에게 일방적으로 선을 그었습니다.

 “우린 친구로 지내는 게 좋겠어.”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절 만나러 온 Y에게 대뜸 폭탄선언을 해버렸습니다. Y와 저는 지금도 빨간 전화 부스가 있는 그 장소를 지날 때면 서로 눈치를 보며 민망한 웃음을 짓습니다. Y는 제게 뻥 차인 이별 장소에 가까이만 가도 "으. 여너무 싫어." 하며 얼굴을 찌푸립니다. 애증이 공존하는 추억의 공간에는 여전히 미안하고 면목없는 제 마음이 덕지덕지 서려 있습니다.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랑은 시작하면 안 된다고 철석같이 믿고 저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으니까요. 그 결과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반려자를 놓칠 뻔하였습니다.


기온이 뚝 떨어지던 늦가을의 어느 저녁.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생동감이 넘치던 Y의 분위기와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 버렸습니다. “오늘은 집에 못 데려다줄 것 같아.”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Y에게 알겠다고 답하고 혼자 밤길을 걸으면서 내심 치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밤중에 혼자 걸어가라니 너무해.” 너무나 철없고 이기적이었고 모든 것에 서툴었던 이십 대의 저를 돌이켜 보니 괴롭습니다.

 그토록 몹쓸 일을 벌이고도 그와 웃으며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단단히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Y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를 만나면 휙 돌아서거나 피하는 것은 물론 본래 몰랐던 사람처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나를 못 본 건가?'

'너무하네. 인사도 안 받아 주다니. 안 만나길 잘했어!'

그의 마음을 헤아려볼 노력은 못하고 끝까지 제 생각만 했습니다. Y와 친구로 지낼 수 없어 아쉽기도 했고 야속하다고도 느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딱 두 명의 주변 사람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들의 입을 통해 통렬히 내 과오를 깨닫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들은 제게 귀인입니다.


"Y한테 친구로 지내자고 했더니 인사도 안 받아주고 나를 피하더라." 친한 남사친에게 털어놨는데 남자의 마음을 잘 아는 그가 나를 나무랐습니다.

"상처받았으니까 그렇지. 상처받아서 인사하기도 힘든 상황인 거야. Y형처럼 좋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아... 이건 남자다움이나 성향에 관한 문제가 아니구나. 내가 그에게 큰 상처를 준 거구나. 그때서야 타격이 세게 오면서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Y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저는 그가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쿨하게 웃어주길 바랐습니다. 그건 쿨한 게 아니라 잔인한 건데. 남의 입을 통해 Y의 진심을 알고서 남몰래 많이 울었습니다.


우린 그렇게 완전히 멀어진 사이가 되었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습니다.

‘Y는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있을까.’ 그의 안부가 궁금하던 가을밤에 여동생과 대화를 하다가 매우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았습니다. 당시의 여동생은 나를 앞질러 결혼한 지가 이년 정도 된 잉꼬부부였습니다.

“넌 제부 처음 만났을 때 엄청 설렜지?”

“아니. 전혀.”

침대 위에 엎드려 있던 저는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뭔가 대단한 실수를 저질렀구나!’ 나의 사춘기 소녀 같은 연애 판타지가 Y처럼 좋은 사람을 놓치게 만든 것입니다. 여동생을 다그치며 재차 물었습니다.

“떨리지도 않는데 어떻게 제부랑 사귀었어? 네가 예전 감정을 기억 못 하는 거 아니야?” 여동생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더니 답답하다는 듯이 되물었습니다.


막 심장이 두근거리고 터질 것처럼 설레어야만 사랑하는 거라고 누가 그래?"

"보통은 다들 그러지 않아?"

"그렇지 않고도 얼마든지 서로 사랑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연애 초반보다 지금이 훨씬 좋아.” 잘못된 고정관념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뒤늦게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 Y는 이미 떠났고 그가 나를 스칠 때마다 풍기는 분위기는 냉랭하다 못해 엄동설한이었습니다. 어쩌면 Y가 나를 몹시 싫어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아찔했습니다.


그러나 아까운 Y를 뻥 차버리고 백일 가량의 시간이 흘렀을 때의 우리는 원수도 아닌, 친구도 아닌, 연인 사이로 발전해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간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으니 어찌나 감사하고  일인지요.

Y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과 잘 맞는 사람,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 이와 함께하는 것이 삶 전반에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 체감하고 있습니다. 미칠 듯이 가슴이 뛰지 않아도 상대를 내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웠습니다.

‘저런 사람이랑 만나면 참 행복하겠지.’ 이런 확신이 드는 이성이 있다면 일단 붙잡고 볼 일입니다. 연애 좀 해봤다고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누구처럼 심장 박동 수까지 신경 쓰며 망설이다간 좋은 사람 다 놓칩니다.


피천득의 ‘인연’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 줄 알지 못하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아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며, 현명한 사람은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 줄 안다.” 좋은 인연을 제대로 알아보고 관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현명한 사람이 되야겠지요.

 백일 가량 시간이 흐른 후 용기를 내서 Y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땐 내가 정말 미안했어. 혹시 시간이 된다면 밥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겠어.

다음날이 되도록 Y에게선 아무런 회신이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또다시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후회하던 찰나에 드디어 기다리던 응답이 왔습니다.

←나는 언제라도 좋아.

답정 미세스쏭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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