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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Jan 18. 2024

글이 알려 주는 진짜 내 모습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

 지속적으로 글을 쓰다 보면 '진짜 내 모습'을 섬광처럼 발견하게 된다. 글에 비치나를 보고 '이게 진짜 나인가?' 의아하다가 어느 순간 '이게 진짜 나이구나!' 깨닫고 인정하는 순간이 온다.

 누군가 너는 어떤 작가가 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유쾌한 한 방'이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하겠다. 내가 쓴 대부분의 글에는 나름의 웃음 포인트가 있다. 억지로 웃기려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열 개의 글을 쓰면 아홉 개의 글에 스스로 이건 좀 재미있다 하는 부분이 담기거나, 이 부분은 읽고 재밌어해 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게 된다. 처음엔 나의 그런 모습 자체가 의아하고 고민이 됐다. 혹시 내가 '진지충'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걸까. 왜 글을 통해 남을 웃기고 싶어 할까? 설거지를 하면서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계속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바로 그게 나였어.'

 

 나는 대체로 진지한 사람이지만 모든 일에서 반드시 웃음 하나는 챙기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웃음을 나눌 때 파닥파닥 왕성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다. 자연스럽게 웃기는 글을 만나면 그 글을 쓴 작가를 사랑하게 된다. 힘든 일을 겪을 때에도 이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한 번은 웃을 수 있는 일을 찾고야 만다. 호탕하게 웃든 피식하고 웃든 모든 웃음이 여태 나를 살게 했다.


 제 아무리 각을 잡고 멋진 글을 쓰려고 해도 결국엔 웃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이거 강박 아니야?' 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이를 두고 고심하던 중에 문득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학생 때 우울함이나 권태로움에 빠진 친구, 사춘기를 겪는 친구들이 나를 찾던 공통적인 이유도 바로 웃음이었다. 친구들은 웃고 싶지만 웃을 일이 없을 때면 꼭 나를 찾아왔다. "우울해. 나 좀 웃겨 줘 봐." 속은 내향인이었던 나는 "왜. 우울하냐? 뭘 또 웃겨 달래." 하면서도 웃음셔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한 번도 싫어, 피곤해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의 웃음이 터지면 동시에 자아가 실현됨을 느꼈다. 예쁘다는 말만큼이나 "너 웃겨. 재밌어."라는 칭찬을 좋아한다.


 앞으로 성향이 바뀔 수도 있지만 안에 천진함이 소멸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함과 공존하는 글을 쓰고 싶다. 삭막한 세상에서 누군가 글을 읽다가 "풋. 웃기네.", "하. 이거 재밌네." 실없는 웃음이라도 터뜨다면 좋겠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웃음 가락이 힘을 실어 준다면 글은 몫을 모두 해낸 글이라고 본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쓴 글을 똑같다." 독일의 소설가 루이제 린저가 남긴 말이다. 글을 허투루 쓸 수 없는 이유, 내 글에 대한 반응에 울고 웃는 이유가 바로 내가 쓴 글이 곧 나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계속해서 나는 나의 글을 쓰겠다. 유쾌한 두 방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한 방은 꼭 명중시키는 그런 글을 쓰겠다.

 나의 유별난 독자 사랑에 대해 글로 보답할 기회를 허락해 주. 그리고 작가님들께서는 계속해서 각자의 개성과 색깔을 담은 글들을 많이 셨으면 한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글만으론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의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진: 미세스쏭작가 (이 글의 웃음 포인트: 없을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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