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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Apr 25. 2023

네 살 스승님의 가르침

이모는 오늘도 한 수 배웠습니다

비염과 감기로 인해 한동안 고생하고 있던 나의 조카. 조그만 콧구멍 속이 답답한지 자꾸만 코를 만지고 후빈다. "금방 코판 거야?"라고 묻자 부끄러운 듯 혀를 내밀며 귀엽게 웃는 나의 조카 담이. 조카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가끔 장난을 걸고 싶은 충동이 인다.


"아까 코딱지 먹는 거 본 것 같은데?" 거짓말을 하는 내 말에 표정이 굳어지더니 조카는 아니라며 딱 잘라 해명을 했다. 정색하는 얼굴이 귀여워서 "분명히 봤는데?"라고 연신 놀리자 담이는 다시 인내를 발휘하며 "아니야."라고 짧은 답을 했다. "이상하다. 코 파서 먹는 거 내가 봤는데." 그러자 네 살 아이가 단호한 목소리로 이모에게 하는 말. "우리 서로 좋은 말만 하자. 예쁘게 말하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알았지?"


와우. 이런 걸 바로 말발이라고 하나보다. 더 이상 장난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알겠어. 미안해." 웃으며 사과를 건네자 조카는 "그래.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기로 약속." 하며 조그마한 새끼손가락을 건넸다. 나는 귀여운 새끼손가락에 얼른 고리를 걸며 "약속"이라고 따라서 말했다.


좋은 말만 하자. 예쁘게 말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

집으로 돌아와서도 며칠 동안 또롱또롱한 조카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이의 당부와 가르침 사이에서 나를 돌아보니 부끄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모는 욕도 좀 하고 편안한 사람들을 만나면 비속어도 잘 쓰는데. 좋은 말만 하고 게다가 예쁘게 말을 하란다. '말투 하나 바꿨을 뿐인데.'라는 책 제목만 봐도 찔렸던 사람인데. 짓궂게 놀리는 이모에게 사이좋게 지내보자며 먼저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무해한 네 살배기 선생님. 그녀 앞에서 나는 가끔 발가 벗겨진 성인이 되곤 한다.


곤란하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나긋나긋한 말투로 이모를 타이르는 조카를 보며 '나도 저렇게 살고 싶은데 쉽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부럽기까지 했달까. 화가 났을 때에도 예쁜 말투로 이야기하기. 영영 볼 사람이 아니라면 노여운 순간에도 욱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기. 이렇게나 기본적인 것들이 이모라는 작자는 참 어렵더란 말이지. 이물 없는 사이의 사람들에게 좋은 말(만...) 하기. 예쁜 말투로 말하기. 그다지 자신은 없다만 네 살 스승님을 떠올리며 다짐새긴다.


늦은 밤에 홀로 글을 쓰며 생각했다. '오늘 나는 예쁜 말만을 사용하였던가.' 하루 동안의 내 언행을 돌아보니 흠흠. 오후에 요리를 하다가 양념이 잔뜩 묻은 조리 도구를 두 번이나 떨어뜨렸다. 처음엔 "아이쿠"하며 넘어갔지만 두 번째"스파"(온천, 휴양시설, 자쿠지)라는 단어를 뱉고야 말았다. 사방으로 튄 양념은 닦으면 그만이지만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속이 상했다. 네 살 스승님 향는 길은 참으로 멀고 어려운 여정이지만 겹겹이 묵은 때를 씻어내고 새 인생을 사는 제자가 되고야 말리라.

스승님의 귀한 가르침을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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