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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Apr 26. 2023

외할머니 곁에 에이스 크래커

디어 마이 그랜마

 평생 바지런히 농부의 삶을 사신 외할머니의 댁은 영광 법성포에 있다. 우리 가족들이 사는 곳에서 외할머니 댁까지는 왕복으로 일곱 시간이 족히 걸린다. 외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은 언제나 고됐고 그만큼 애틋했다. 몇 번이나 화장실에 가는 것을 참고 때때로 올라오는 멀미를 견디고 나면 영광에 있는 마트에 도착했다. 외할머니를 뵙기 전에 마트에 들러 과자, 음료, 반찬 등의 식료품을 넉넉하게 사는 것은 필수 절차였다. 외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에이스 크래커도 항상 잊지 않고 장바구니에 담았다.


 외할머니께는 딱히 취향이라는 것이 없었다. 막걸리와 인스턴트 삼박자 커피를 가장 선호하셨고 그 외에는 무얼 드시든지 좋다 싫다로 평가하시는 경우가 드물었다. 딱 두 번 외할머니의 기호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감말랭이와 에이스 크래커를 드실 때였다. “아가. 이거 맛있다.” 에이스 크래커는 유일하게 외할머니의 간택을 받은 과자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할머니 이거 앞으로 내가 많이 사줄게.”라고 했다.


 22년도 9월 24일에 나의 그녀 외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대명절인 추석이 껴있는 구 월은 외할머니와 우리 식구들을 잇는 오작교의 역할을 한다. 외할머니 댁에 가기 전에 역시나 마트에 들렀다. 가장 먼저 에이스 한 상자를 집었다. 그리고 막걸리를 사려는 찰나였다. 엄마께서 “막걸리는 안 돼.”라고 말씀하셨다. 의아해서 왜냐고 묻자 엄마는 “외할머니께서 기력이 많이 쇠해지셨기 때문에 막걸리를 드시면 큰일 나.”라고 설명하셨다. 쿠궁! 마음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막걸리를 이제는 못 드시게 되셨다니.


 다시 구불구불 시골길을 달렸다. 컹컹 개 짖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외할머니 댁의 앞마당을 밟았다. 자동차 소리가 들리면 얼른 마중 나오시곤 했는데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신없이 짖어대는 개들 때문에 겁이 났다. 햇빛이 반사되는 두터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몸이 많이 편찮아 보이시는 외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 우리 왔어. 할머니 아파? 어디 아파?” 나는 외할머니 손을 주물럭주물럭 만지고 볼을 비비고 재차 껴안았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재잘재잘 할머니를 부르고 또 불러대는 내게 당신은 다짐하시듯 말씀하셨다.

 “나 아픈 데 읎어. 너희 생각해서라도 안 아파야 겄다.”


 여름 냄새가 사라지고 있는 구 월의 초가을.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서울과 경기도의 식구들이 다 모인 신기한 날. 시골집에 북적거리는 말소리와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다. 기력이 약한 외할머니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엄마 이것 드셔.” 하며 각자 준비해 온 식사거리와 군것질거리를 내밀었다. 나는 간식을 한가득 꺼내서 외할머니 방에 진열했다. “이거 할머니가 좋아하는 과자. 나중에 드세요.”라며 에이스를 가리켰더니 할머니는 “응.” 하시며 잠시 파란색 에이스 상자를 바라보셨다. 할머니 곁에 에이스 상자를 두고 다시 먼 길을 돌아오는 길. ‘조만간 또 외할머니를 만나러 와야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가는 가로수와 멀어지는 할머니 댁.  도로 위로 저무는 가을 햇살을 응시하며 자주 할머니를 찾아뵙겠다고 다짐했다.


 영광에 다녀온 아홉 날이 지나고 나른한 공휴일의 아침이었다. 잠에서 덜 깬 눈으로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며 울고 말았다.


 2022년 10월 2일 밤, 엄마의 메시지. “외할머니 보고 싶다.”

 2022년 10월 3일 새벽, 엄마의 메시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시간도, 건강도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번은 더 뵐 수 있을 줄 알았다. 농부로 사신 외할머니의 뭉툭한 손. 익어가는 가을을 닮은 그녀 눈가의 깊은 주름. 모든 것이 그립고 안타깝기만 하다. 외할머니 댁에 가면 나른한 시골 풍경을 감상하며 삼박자 커피에 에이스 크래커를 즐겨 먹었다. 이전처럼 외할머니 곁에 당신이 좋아하시던 과자며 막걸리며 감말랭이를 두고 올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소박한 것들조차도 이제는 전해드릴 수 없게 됐다. 삼박자 커피와 에이스 크래커를 언제쯤이면 다시 이전처럼 즐길 수 있을까. 할머니가 떠난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어떤 계절을 지내든 그 계절 속에 녹아든 농부의 모습으로 사셨던 외할머니를 이젠 눈을 감고 만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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