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더듬어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후문 풍경을 그려보면 세 개의 문구점이 있었고 그중 한 곳이 흰머리의 노부부가 운영하시던 ‘바른 문구’였다. 나와 친구들은 별 매력이 없는 바른 문구보다는 규모가 크고 정리가 잘 돼있는 문구점에 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삼삼오오 모여 학교 운동장에서 야외 활동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 한 명이 “야. 너 바른 문구 아이스크림 먹어 봤냐?” 하고 화두를 던졌다. 그러자 너 나 할 것 없이 “거기 아이스크림 맛있지?”, “말하니까 또 먹고 싶다. 진짜 맛있더라.”라며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바른 문구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아? 오늘 학교 끝나고 나랑 같이 먹으러 갈래?” 마지막 수업 종이 울리자마자 친구들의 손을 잡고 바른 문구로 달려갔다.
바른 문구 입구 안쪽에는 못 보던 은색 큰 기계가 들어서 있었고 손잡이 윗면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콘 300원, 컵 500원.’
문구점 주인인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걸어 나오셨다. “뭐 줄까?” 우리는 힘차게 인사를 하고 일동 아이스크림 주세요를 외쳤다. 기계 전원을 켜시는 할아버지의 손을 초조만 마음으로 응시했다. '제발 많이 주세요.' 텅텅 거리는 모터 소리와 함께 우윳빛 아이스크림이 돌돌 말려 나왔다. 바른 문구의 시그니처인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문구점을 나왔다.
뾰족한 윗부분을 한 입 베어 물자 고소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여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고급스러운 소프트 콘의 맛이었다. “야. 이거 뭐냐?” 너무 맛있어서 표현할 길이 없다는 표정으로 친구들을 보았다. “맛있지?” 아이스크림을 한 손에 들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웃는 군것질 동지들.
바른 문구의 아이스크림은 전교생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문구류보다 몇 배로 잘 팔리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은 자타 공인 바른 문구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많이 주세요."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부부가 가장 많이 듣는 고객의 소리였을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면 정문이 빨랐지만 바른 문구의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훨씬 먼 후문을 자주 이용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아이스크림을 여름 방학이 되고 한동안 먹지 못했다. 순전히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서였는지 심부름 때문이었는지 모처럼 학교 근처로 향했다. 무더운 여름날 텅 빈 학교 운동장을 지나며 쩌렁쩌렁 반가운 매미소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컵 아이스크림 주세요." 조금이라도 더 주십사 아주 공손하고 깍듯하게 인사를 드렸다.
드디어 내 손에 들린 바른 문구의 베스트셀러. 얼마나 그리웠던가! 조심스럽게 한 입을 맛보고 ‘그래. 이 맛이지.’ 행복을 음미하는 찰나였다. 한가로운 거리에는 행인이 한 명도 없었다. 분명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금수 같은 속도로 달려온 누군가가 내 어깨를 치더니 “푹!” 하고 아이스크림을 낚아채갔다. 나의 손에는 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아이스크림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너무 놀라서 오장육부가 신발 바닥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같은 학교의 고학년 오빠, 아니 육학 년 놈이 나의 아이스크림을 게걸스럽게 처먹고 있었다. 씩 웃으면서 손가락 네 개를 입안에 넣고 ‘바로 이 맛이야!’하는 표정으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역대급으로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열 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나를 응시하는데 무서워서 오금이 저렸다. 아이스크림을 다시 사고 말고 할 정신도 없이,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울면서 집으로 왔다. “엄마. 엉엉.”
그 후로도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몇십 번은 더 바른 문구의 아이스크림을 찾았다. 그때 그 육 학년 놈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던 걸까? 나를 놀리고 싶었던 걸까? 아마도 전자의 이유로 나의 아이스크림을 납치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뙤약볕 아래서 아이스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샅샅이 핥던 놈의 괴이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얼마 전 가족들과 사이드 뷔페가 있는 한식집에 갔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와 강정, 소프트아이스크림까지 다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사이드 메뉴에 관심이 더 많은 나는 메인 메뉴가 나오기도 전에 아이스크림을 한 사발 떠 왔다. 아이스크림이라면 결코 지지 않는 남동생도 이에 합류했다.
도톰하게 겹겹이 쌓인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 순간이었다. 나와 남동생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거. 그 맛 난다.” 남동생이 먼저 입을 뗐다. “와. 그거네! 바른 문구 아이스크림!” 거의 이십 년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고 생생하게 떠오르는 맛.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납치 사건이 발발할 정도로 구미가 당기는 맛!
오랫동안 궁금했다. 내가 밥먹듯이 찾던 몇몇 군것질 거리는 과연 지금 먹어도 그때처럼 맛이 있을까? 아니면 추억으로 미화된 맛을 기억하고 있던 것일까? 밥은 둘째치고 오한이 날 때까지 아이스크림을 리필해 먹는 우리를 보니 바른 문구 베스트셀러의 비결은 역시 맛이었구나 싶다.
추억의 맛, 지금은 맛볼 수도 없고 어디서 살 수도 없게 돼버린 것들을 함께 생생하게 기억하는 동지들이 있어서 좋다. 별것 아닌 것에 풍족한 행복을 느끼는 나의 이러한 속성이 궂은날을 견디게 한다. 역시 아직까지는 영양제보단 군것질이 내게 불끈불끈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