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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May 05. 2023

엄마 쓰앵님의 위대한 수업

진귀한 일타 강사

꾸러기 시절의 내 눈에 엄마는 항상 위대하고 고상하고 명철한 선생님이셨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독서 습관을 심어주기 위해 본인이 먼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우리 집 거실은 흡사 작은 도서관 같았다. 엄마 덕분에 나도 자연스럽게 책을 사랑하게 됐다. 독서를 통해 쌓은 어휘력과 유추 능력은 전 교과목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지금도 독서를 좋아하는 덕에 심심한 줄 모르고 살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큰 축복을 누리는 셈이다. 낙후된 시골 마을에 살았지만 청정한 자연은 신의 선물이었고 엄마의 열정으로 교육은 교육대로 잘 받으면서 자랐다. 그 시절만큼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천국을 닮은 계절이다.


엄마의 위대하고 독특한 수업 중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엄마는 외국인 구경도 하기 힘든 어촌 동네에서 나를 원어민 선생님이 계신 회화 학원에 보냈다. 지금으로 치면 매우 늦은 나이인 열 살에 원어민 회화 교육을 접한 것이지만 귀를 쫑긋 세워 선생님의 발음을 듣고 눈을 크게 뜨고 선생님의 입 모양을 보면서 영어를 공부했던 것이 두고두고 큰 도움이 되었다. 학원에서 같은 반이었던 남학생이 원어민 선생님께 장난으로 중지를 내밀었다가 손가락이 꺾이는 장면을 본 것도 매우 기이한 문화 체험이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꼬마 고객의 손가락에 달려들던 선생님 덕분에 무례함에 대한 응징(?)은 저렇게 하는 것이군 하고 배웠다. 그 후로 모두가 얌전하고 차분히 선생님의 수업에 응했다. 따라서 더욱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다.

  

엄마의 방과 후 수업은 늘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나는 엄마의 가르침을 흡수하기 위해 엄마만큼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했다. 이런 자식이라면 교육하는 재미가 제법 컸을지도!?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엄마만의 클래스가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속독 수업이었다. 엄마가 누군가에게 돈 주고 프로그램 하나를 구매해 오셨는데 컴퓨터 모니터를 가만히 응시하며 속독을 깨우치는 과정이었다. 검은 점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다가 최종 단계에서는 대각선으로 글을 읽고 문제까지 푸는 수업이었다. 오로지 혼자서 따라가야 하는 프로그램이었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신나게 배웠다. 덕분에 나는 두꺼운 책을 하루에 한두 권씩 읽고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독서를 하려면 건강한 신체와 체력이 매우 필요하다는  최근에 배웠지만 말이다.


다음으로 신기했던 수업은 일렬로 자대고 글씨 쓰기 수업이었다. 글자를 오르락내리락 쓰지 말고 일렬로 기록하라며 엄마는 긴 자를 가지고 오셔서 나와 함께 책상에 앉았다. “오른쪽 밑으로 치우친다.”, “옳지. 이제 많이 좋아졌다.” 나중에는 자가 없이도 일자로 반듯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일렬로 예쁘게 쓴 글을 보니 뿌듯하고 가슴이 벅찼다. 놀랍게도 엄마의 글씨 쓰기 수업은 엄청난 파급 효과를 발휘했다. 초중고 시절 내내 선생님들께서는 수업시간에 내게 판서를 부탁하셨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칠판에 좀 써 줄래?” 내가 진한 초록색 칠판에 하얀 분필로 또박또박 글자를 쓰는 동안 선생님은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며 수업 준비를 하셨다. 선생님들은 서기 일을 즐겁게 하는 나를 예뻐해 주셨고 친구들도 내 글씨와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좋아했다. 글짓기와 판서는 내향적이었던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엄마의 전매특허 수업을 최종적으로 하나 더 소개하자면 이름하여 무릎과 무릎 사이를 붙여서 걷기. 엄마는 걸을 때마다 “팔자걸음으로 걷지 말고 일자로 걸어.” 하며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주시했다. 가끔 귀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 또한 팔자걸음으로 걷는 것을 원치 않았다. 원하는 모양새로 걷게 되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참을성을 발휘하며 항상 한결같은 목소리와 톤으로 나의 자세를 교정했다. 가끔 걸음걸이가 흐트러지면 여전히 엄마의 음성이 지원되는 듯하다. “무릎과 무릎을 스치듯 예쁘게 걸어.” 엄마가 주는 당근과 채찍이 모두 달콤해서 습관을 고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내가 일부러 더 팔자로 다리를 쫘악 쫘악 벌리면서 걸으면 엄마도 나도 큰 소리로 웃었다. 나중에 친구들이 팔자걸음으로 걷는 친구의 모습을 흉내 내며 “쟤는 왜 저렇게 걸어?” 하며 킥킥댈 때 ‘걷는 모습을 고치길 정말 잘했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 한 권을 써내도 부족할 정도로 엄마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방과 후 수업을 줄기차게 해 주셨다. 엄마의 가르침은 항상 내가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것들에서 출발했다. 당신의 관심과 시선이 늘 자식을 향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마는 글을 반듯하게 쓰는 방법을 가르쳤지만 그 결과 심히 내성적이었던 나는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서 인싸(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가 되었다. 엄마의 애정 가득한 수업을 일렬에서 재미있게 따라가던 학생은 흥도 많고 재주도 많은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나는 자주 부모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 같다. 머리 좀 컸다고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심드렁한 답변은 또 얼마나 자주 하는지 영 밥맛없다. 부모님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야겠다. 엄마의 방과 후 수업이 없었다면 나는 팔자걸음으로 걸으며 남들 질문에 모기만 한 목소리로 답하며 놀림이나 당하는 땅콩 소녀로 살았을 거다. 그러니 쓰앵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굽신굽신.

부모님 댁에 갔다가 엄마가 이십 년 전에 써주신 편지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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