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잘 지내고 있었다. 자두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웠지만 비로소 반려견 없는 일상에 적응했다. 남편과 함께 자유로이 여행도 다녔고 그동안 못 갔던 노펫존도 마음껏 드나들었다. 하루에 세 번 배변 산책을 하지 않아도 되고, 길 가다가 다른 강아지를 만날까 노심초사하는 일도 없고, 마음 편히 외출도 할 수 있는 생활을 하며 자유란 이런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해가 질 때면 보란듯이 깊은 슬픔이 몰려왔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부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이 좋지만, 지금도 좋지만, 강아지 가족이생긴다면 훨씬 더 좋을 것 같아.' 다시 반려견과 함께 하기 위해남은 용기를 모두 짜내고 싶었다.
유기견 분양을 위해 교육을 이수했고, 파양 당하는 반려견 소식을 받기 위해 하루에도 수 번씩 무료 분양 카페를 드나들었다. 두 달가량 적합해 보이는 상대에게 연락을 취했다가 기다렸다가 혼자 들떴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가족들 모두 상처가 큰 상황인지라 반려견 입양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늘 내 편인 남편조차도 여전히 두려움이 커서 안 되겠다는 입장이었다."만일 데려왔는데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해? 난 두 번은 못 견딜 것 같아." 나 역시 그와같은 마음인지라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내 생일이 며칠 지난 여름 오후였다. 남편과 나는 거실에 앉아 어딜 갈까, 무얼 먹을까 하며 핸드폰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우리가 두 달 넘게 지켜봤던 아기 강아지 사진을 봤다. 켄넬 사업장을 정리하는데 남은 강아지들에게 꼭 좋은 가족을 만나게 해주고 싶단 소식이 적혀 있었다.
"여기 한 번만 가 보자." 나는 남편에게 파주의 시골 마을 주소를 보여주었다. 남편은 면접관처럼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다시 강아지를 키울 수 있겠어? 이제 마음대로 외출도 못 하고 여행도 가기 힘든데 괜찮겠어?" 그러게나 말이다. 지금 어느 때보다도 편하고 안정적인데 내 마음이 왜 이럴까.풀 죽은 내게 남편이 말했다. "가서 보고나 오자. 대신 건강하지 않아 보이거나 자두처럼 사회성이 없으면 못 키울 것 같아." (자두야 미안하다...)
차를 타고 처음 가보는 동네로 향하는 길. 온갖 생각과 걱정과 두려움과 슬픔이 앞섰다. 긍정보단 부정에 짓눌린 감정이 괴로워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여보... 그냥 차 돌릴까?" 쭈글이가 된 나를 남편은 다독이듯 말했다. "가 보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너무 실망하진 말고. 일단 가자." 그 길이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차 안엔 적막한 긴장감이 돌았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이 얼마나 큰 결단과 노력을 요하는 줄 알기에. 반려견의 가족으로 사는 나날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또 슬픈지 알기에 두려움이 앞섰다.
사실 우리는 만난 적도 없는 반려견의 이름까지 지어놓은 상태였다. "송하임. 하나님의 임재." 자두를 떠나보낸 후 삶을 바라보는 소망을 이름에 담았다. 우리는 반려견과 함께 셋이 되어 집으로 오는 상상을 했다. 또 반려견이 없이 단 둘이 돌아올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복잡한 심정을 헤엄치는 사이에 마당과 옥상이 딸린 시골집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을 때 '하임'이를 보았다. 까만 배냇털로 뒤덮인 아기 실버 푸들을 본 순간 특별한 안정감과 기쁨을 느꼈다. 모든 복잡한 심정이 풀어졌다. 남편의 눈에선 이미 굉장한 하트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음이 먼저 알았다. '아. 우린 가족이 되겠구나. 이게 가족의 인연이구나.'
하임이를 데리고 나오는 길. 어딜 가도 사진 찍어 달란 소리를 하지 않던 남편이 처음으로 내게 "나 사진 좀 찍어 줘."라는 요구를 했다. 자두와 가족이 됐던 그날처럼.
다시 식당에서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없는 신세가 된 우리는 맛집에 잠깐 들러음식을 포장했다. 품으로 파고드는 하임이를 소중히 껴안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우리 부부가 거실로 들어서자 가족들이 차례로 실망한 표정을 보였다. "강아지 안 데리고 왔나 보네?" 나는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별생각 없다며."
그때 하임이가 총총 거리는 걸음으로 가족들을 향해 달려왔다. 남동생과 엄마와 아빠는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마냥 기뻐했다.
"오메. 이게 누구야! "
"세상에. 예뻐라."지붕을 뚫는 웃음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이름은 하임이야. 송하임."
"아이고. 하임아. 이리 와."
"하임아. 세상에. 하임아. 우쭈쭈."
다시 반려견이 함께 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자두가 준 사랑을 하임이에게 넘치게 흘려보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