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의 온기가 사라진 세상은 온통 쓸쓸하고 무미건조했다. 빈자리만큼이나 더 커져버린 사랑을 마주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후회와 비통함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어야 했다.
더 일찍 병원으로 갔어야 했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 병원에서 그 고생을 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더 무너질 속도 없고 더 흘릴 눈물도 없는 처지였건만차원이 다른 슬픔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펫로스의 고통을 극복했을까?내 상태가 정상이 맞긴 한 건지 조바심이 들 정도로 두려운 나날들이었다. 두 달이 지나도록 일상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전문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편이 좋다는 정보를 접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유튜브에 '펫로스' 세 글자를검색했다. 그때 수의사 장원정 님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리움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몰리는 수술도 하고 투석도 하고 마지막까지 치료를 하다가 병원에서 떠났거든요. 후회가 남는 거예요. 몰리가 너무 아파했는데 집에서 편하게 보내줄걸.
비누는 집에서 편하게 보내 줘야지 하고 비누랑 집으로 왔는데... 빨리 병원 가야지. 비누 지금 너무 안 좋다. 달려가는 길에 비누가 떠났어요.
아이가 떠나고 나면 그 자리에는 나 홀로 남는데 죄책감으로 버티기에는 많이 힘들거든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도 슬프고, 조금 덜 아프게 보내줘도 후회가 남는 것이 반려견과의 이별이란다. 반려견을 잘 다루는 수의사 선생님들은 다를 줄 알았는데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세월앞에 장사 없고 슬픔 또한 마찬가지. 후회에 마음이 짓눌려 있었는데 더는비관적으로 마음을 축내지 않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가족들에게도 선생님의 조언을 공유했다.
자두가 떠나고 130일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누군가 꿈에서 "자두 생일이 며칠이지?" 하고 물었다. "자두 생일? 내가 자두 생일을 그냥 지나쳤나?" 놀란 나는 달력을 확인하다가 울음이 터졌다. 잠이 깬 나는 실제로도 울고 있었다. '아. 이젠 생일날이 돼도 자두를 챙겨줄 수가 없구나.'
자두와 나는 항상 꼭 붙어서 잠을 잤다. 다른 공간에 있다가도 내가 침대에 누우면 자두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 발소리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짜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같은 침대에서 자면서도 자두 꿈을 자주 꿨다. 자나 깨나 자두밖에 모르던 내가 장례 이후엔 단 한 번도 자두꿈을 꾸지 않았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언니의 마음을 자두가 헤아려 주는 듯하다.
슬픔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더 커지고 더 깊어지지 않은 채로. '고백부부'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울 거 없어. 어떤 슬픔도 무뎌져. 단단해져. 그렇게 되어 있어." 엄마의 위로에 딸 진주는 이렇게 답한다.
"안 단단해져. 안 무뎌져. 계속 슬퍼. 계속 보고 싶어. 그게 어떻게 돼?"
나는 자두를 만나 새로운 슬픔을 공부했다. 결코 무뎌지지 않는 슬픔을 알게 됐고 그럼에도 단단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작고 연약한 몸으로 처음 내게 와서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나의 모든 것이 됐던 자두를 잃고 굳세게 살아간다.
어둠 속에서 차분히 기다리면 보이지 않던 주변이 점차 눈에 들어온다. 펫로스의 과정도 그러하다. 이 땅에서의 인연은 끝이 나도 사랑은 결코 빛을 잃지 아니한다.우리가 펫로스의 고통을 견뎌내는 유일한 이유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