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B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지금 몇 달째, 아니 심경의 변화를 따지고 보면 벌써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혼을 고려하고 있다. 지금처럼 사는 건, 하루하루 자기 자신을 죽이는 시간이라고 말하던 그녀는 갑자기 말을 삼켰다. 일 분이 넘도록 침묵을 지키는 그녀가 전화선 너머에서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나의 마음이 조여왔다. 목소리로만 그녀의 아픔을 들어야 한다는 지금의 상황이 야속했다. 얼굴을 보고 부둥켜 울다 보면 설익는 농담이라도 주고받으며 조금이라도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을 텐데.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손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은 사랑하는 이의 아픔을 마주했을 때 더 크게 와 닿는다.
이제는 살고 싶다며 울부짖던 그녀가 선택한 첫 번째 변화는 전보다 임금이 높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홀로서기였지만 홀로가 되었을 때를 염두에 둔다면 먹여야 하는 입이 줄어들지언정 '돈'의 중요함까지 줄어들지는 않는다. 타산을 따져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지만 그녀는 현명하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원하던 직장에 취직했다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어두웠다. 공교롭게도 직장은 살고 있는 지역과 반대편이었다. 아침마다 빼곡하게 길에 들어선 차들 속에서 2-3시간의 시간을 소모하고, 또 다른 2-3시간을 퇴근시간에 사용하기에 그녀는 너무 지쳐있었다. 일주일에 3일은 직장과 가까운 공간에서 지내고, 나머지 시간을 가족과 보내며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던 소식에 나는 '자연스럽게 이혼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었구나. 그녀가 원하던 미래에 가까워지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음에 한 말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운전하느라 보낸 시간과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에 그녀에게 찾아온 건 혼자서 보내야 하는 시간과 그에 비례해 한없이 커져버린 외로움이라고. 그녀는 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한참을 말없이 전화기만 붙들고 있던 B. 그녀가 다음 말을 하기 위해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구나라고 어렴풋이 짐작만 하며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길 기다렸다. B는 떨리는 목소리로 막상 이혼이 현실로 되어 다가오자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섭다고 말했다. 지금 마주한 이 외로움이 너무 어둡고 춥다고. 그저 사랑하고 사랑을 표현하며 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아무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느냐며, 사실은 이혼하고 싶지 않다며 서글프게 울기 시작했다.
나의 친구 B.....
그녀는 언제나 반짝반짝 빛이 났다.
재치 있는 농담으로 상대를 편하게 해 주고,
센스 있는 옷차림과 제스처는 어디에 가든 그녀를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녀는 상대방의 아픔을 포근하게 어르는데도 탁월했다.
그녀는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아픔을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늘던 목소리는 그녀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견디며 살고 있는지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자기가 맞닥뜨린 현실이 괴로워 약 없이 생활하기 힘들다던 B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녀와 같이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나의 어둠에 따스한 빛이 되어 주었던 것처럼 나도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길 바랄 뿐.
정혜신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쓴 '당신이 옳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상대방의 감정과 똑같이 느끼는 것이 공감인가. 공감을 잘한다는 건 상대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상태까지 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공감은 똑같이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가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이 그럴 수 있겠다고 기꺼이 수용되고 이해되는 상태다. 그 상태가 되면 상대방 감정에 바짝 다가가서 그 느낌을 더 잘 알고 끄덕이게 된다.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상관없다.
같은 감정을 느껴야만 공감이 아니다. “엄마는 그래 본 적이 없지만 너는 지금 친구가 죽은 것처럼 슬픈 거구나, 그런 정도였구나” 그렇게 말하면 된다. 엄마와 아들도 각자 개별적 존재들이라서 서로가 느끼는 감정은 당연히 다르다. 엄마가 아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정해 주는 느낌을 아들에게 전달할 수만 있으면 된다. 그게 공감이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책에서는 몇 가지 상황을 예시로 보여준다.
첫 번째는 18살 된 딸을 잃은 엄마. 상담자는 딸을 보내고 2년이 지난 후 간신히 첫 출근을 한다. 하지만 첫 출근 날 숨을 쉴 수 없어 응급실에 실려간다. 상담자는 아직도 일반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미친년이라 몰아붙인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딸을 잃은 엄마가 어찌 잘 살 수 있겠는가.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미친년인 거지. 저자는 자신이 미친년이라고 몰아세우던 상담자에게 물어본다. 그녀의 친구가 딸을 잃고 울고 있으면 미친년이라고 부르겠냐고. 아니다. 아마 같이 울었을 거다. 그러니 당신은 미친년이 아니다. 아픔이 많을 뿐이다.
두 번째 예시는 퇴직한 가장의 사연이었다. 그는 일하던 때와 동일하게 새벽 5시에 일어나 공부를 하고, 자기 계발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 와중에도 슬픔과 허무는 계속 찾아온다. 그의 아내가 저자를 찾아와 그가 우울증에 걸렸으니 처방을 내려달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가 당연히 있는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가족으로 퇴직한 가장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공감해주고 같이 이겨내야 할 망정,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그를 우울증이라 판단했다.
우울한 감정도 감정이다. 불안한 감정도 감정이고 슬픈 것도 감정이다. 이 모든 감정은 옳은 감정이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의 감정에 온전히 공감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오늘은 내가 먼저 B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련다.
‘네가 옳아. 네가 느끼는 그 좌절, 슬픔 그리고 우울은 너의 상황에서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야. 그러니까 너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아픔을 혼자 다 짊어지고 있지 말고 언제든 나에게 덜어내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안부나 묻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바른말'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더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 그녀가 소소한 일상에 대해서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날이 어서 오길 바란다. 그 날이 오면 나는 얼굴에 연한 미소를 띠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