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일지 72일째
그렇다. 오늘로 나는 백수가 된 지 72일 째이다. 삼십 대 중반, 화려한 백수 생활을 기대하거나 저금한 돈이 많아 보이는가? 아니다. 아직 세상과 협상을 모르는 막무가내일 뿐. 앞으로 백수에서 벗어날 때까지(지금까지 무계획) 솔직한 일지를 올리려 한다.
눈을 뜸과 동시에 (육체적인 눈은 아직도 감겨있다) 자동적으로 왼편에 있는 서랍장 위에 있는 핸드폰을 찾는다. 실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 벌써 아홉 시 삼십 사분. 어제 대략 열 두시쯤 침대에 누웠으니 최소 아홉 시간을 넘게 잔 거다. 분명히 일곱 시 반에 알람을 맞추고 잤는데 알람을 들은 기억도 없다. 생활 리듬이 바뀌는데 삼주가 걸린다 하였다. 초반에 알람이 없어도 여섯 시 반이면 눈뜨던 부지런한 나는 이제 갔다. 그래, 이제 최소 아홉 시간은 자야 개운한 백수의 체력을 얻었다.
나의 아침은 이십 분의 독서로 시작한다. 아침부터 글자를 읽을 순 없지 않겠는가. 나의 독서는 바로 웹툰. 요일마다 읽는 웹툰의 수가 달라서 어떤 요일은 오분, 어떤 날은 길게 삼십 분을 소모 한다. 백수가 아닐 때는 버스 안에서의 시간이라던가 화장실에서의 시간을 짬짬이 이용하였는데 이제 나는 아침이 여유로운 백. 수. 당당히 침대에서 나의 독서를 마무리한다.
게으르되 건강한 백수를 꿈꾼다. 블랙프라이데이 세일로 헬스장에서 멤버십이 오십 프로 할인을 했다. 모든 할인은 백수인 나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사이버 먼데이 딜을 찾아 헬스장에 등록했다. 오늘 드디어 세 번째로 운동하러 갔다. 잠을 많이 자서 인지, 힘이 샘솟는다. 45분의 웨이트를 하고 나니 예상보다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이제 나의 하루는 나의 고양이들, 봉이와 피노를 어루만지고 끼니를 때우며 독서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백수가 되기 전에는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자유의 몸이 되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나에게는 정당한 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그것들에게 짓눌리기 전에 하나씩 풀어가는 일만이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라고 느꼈다.
더 이상 패션업계에서 트렌드를 좇으며 일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 트렌드는 낭비와 사치일 뿐이야. 친환경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할 거야. 언제나 글이 쓰고 싶었지. 인간으로 성장하겠어.
갖가지 계획과 포부로 가득 차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내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 결정이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칠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회사를 다니다가 사직서를 내는 것은 단순히 이직을 고려하는 게 아니라 터닝 포인트를 목표로 달려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지난 두 달 반 동안 모든 결심은 과거로 남겨둔 채 오로지 백수라는 위치로 하루에 충실하고 있다. 미련하기 짝이 없다. 다행히도 오늘 공지영의 산문,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을 읽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넌 스무 해를 살았니? 어쩌면 똑같은 일 년을 스무 번 산 것은 아니니? 네 스무살이 일 년의 스무 번의 반복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야.
직장인이란 타이틀은 단 후에 나에게는 회사를 다니던 해들과, 지금 현재 백수로서의 72번의 하루가 있다. 내일, 새로운 날을 시작해보련다.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