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보카도 본연의 맛을 살린 과카몰리 - 백수 일지 73일째
하루 종일 장마처럼 굵은 비가 내렸다. 일 년 중에 육 개월 동안 비가 내리니 이제 익숙해졌을 법도 하다. 그래도 비가 내리면 아, 비가 내리네 하고 센티하여진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을까. 동네 친구인 마누엘에게 문자가 왔다. 이제 이삿짐 정리도 거의 다 되어 가니 와인 한 잔하며 간단한 저녁을 먹으러 들리라는 것이었다.
겨울이 되면서 해가 빨리 진다. 마치 밤 아홉 시인 것 마냥 느껴지던 여섯 시, 레드 와인 한 병과 포인세티아 한 그루를 들고 마누엘 집으로 갔다. 키친 카운터에는 깨끗이 닦인 와인 잔과 잘 익은 아보카도, 토마토 그리고 레몬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의 만찬은 과카몰리. 요즘에는 각 종 스파이스와 부주적인 재료를 넣어 만든 과카몰리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과카몰리를 즐기기로 했다.
아보카도 두 알의 속을 빼서 포크로 으깬다. 토마토 하나는 껍질을 벗겨 먹기 좋게 작은 사이즈로 깍둑썰기를 하여 미리 준비한 아보카도에 넣는다. 레몬 반 개를 짜서 즙을 넣고 거기에 소금을 살짝 첨가하면 아보카도 그대로의 맛을 살린, 과카몰리가 준비된다. 나쵸 대신 준비된 건 잘 구워진 토스트였다. 토스트 위에 과카몰리를 올렸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느껴지던 절묘한 조화스러운 맛과 식감이라니. 아보카도의 부드러움과 토마토의 육즙과 레몬의 상큼함이 입 안에서 어우러져 돌았다. 그동안 과카몰리를 많이 먹었지만 이 기본 레시피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즐긴 아보카도는 한 껏 치장된 아보카도였다. 모든 장식을 벗어던진 이 담백함에 몇 그릇이고 물리지 않고 계속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감탄하며 즐기고 있던 찰나, 마누엘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동안 기본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왔어. 사실 가장 맛있는 레시피는 기본 레시피인데 말이야.
이십 대 나날 속에서 알았던 기본은 지루함이었다. 이게 들어가면 더 재밌을 텐데, 아니면 저걸 하면 더 나으려나? 이것도 저것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최소한 저 부분이라도 바꿔야지. 늘 새로움에 목말라하고 거기서 찾는 즐거움만이 최고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이제 삼십 대 중반, 나에게 소중한 것은 각 개체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돋보여줄 작은 도구들을(잘게 잘라진 토마토나 레몬 즙처럼) 알아볼 수 있는 안목과 연륜을 키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