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일지 75일째
유난히도 외로운 날이었다. 바로 삼십 분 전까지는.
하루 종일 맑은 날이 될 거라는 일기 예보가 있었다. 그래서 자기 전에 세운 계획은 이랬다. 7시에 일어나서 운동을 가야지. 그러고 나서 시원한 콩나물국에 밥을 후루룩 말아먹고 자전거를 타는 거야.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바닷가로 가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책을 봐야겠어. 스페인어 공부도 해야지. 아, 얼마나 행복할까. 설레어서 잠도 빨리 안 들었었다.
웬걸, 나의 아침은 계획보다 한 시간 늦게 시작되었다. 귀찮은 마음에 헬스장은 가지 않았다. 어영부영하니 벌써 열 두시. 콩나물국을 먹긴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상쾌한 아침식사가 아닌, 늦은 점심식사였다.
백수가 되고 나서 생긴 나쁜 습관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자기비하. 게으름에 하나도 하지 못한 나의 못남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화는 금세 외로움으로 변했다. 비가 많이 오는 것으로 유명한 밴쿠버에서 몇 번이나 있을지 모를 귀한 맑은 날에 집에만 있는 내 신세가 너무 한심했다. 절실히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인들은 모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터. 직장인에서 무직으로 타이틀이 바뀐 후에 가장 절절히 느끼는 변화는 바로 나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대로 우울함의 우물 속에 나를 던지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해가 떠 있을 때 (이 맘 때면 오후 다섯 시만 되어도 한 밤중처럼 어둡다)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커피숍에 가서 씁쓸하면서 달달한 모카로 나를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간단히 옷을 입고 길로 나섰다.
찹찹하고 상쾌한 공기가 볼이 닿았다.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겨울 하늘이었다.
햇살을 따라서 커피숍을 찾아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아름다운 기타 선율이 귀에 꽂혔다. 기타를 튕기는 때마다 음표가 살아서 나에게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어떤 차가 음악을 이렇게 크게 틀고 운전하나 싶어서 찾고 있었는데 신호가 바뀌면서 차들이 출발했다. 하지만 기타는 끊기지 않고 연주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보았다. 길 건너, 평일 낮에 사람들도 많지 않은 이 길에서 연주하고 있는 애런을.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한 다섯 발자국을 갔을까, 지갑에 들어있는 5불을 꺼내 들고 다시 돌아가서 돈을 넣었다. 1불이 아쉬운 백수이지만 나에게 마음의 평화를 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커피숍을 향해가다 난 다시 돌아갔다. 이대로 가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놓칠 것만 같았다. 혹시 옆에 앉아서 음악을 들어도 되냐는 물음에 그는 흔쾌히 “Of course”라고 답해주었다. 그게 오늘 사람과 나누는 첫 대화였다. '당연하지'라는 한 단어가 가진 힘이라니.
벤치에 앉아 음악에 몸을 맡기고 연주를 감상하는 찰나, 애런이 연주하면서 움직이는 몸의 반동이 벤치를 타고 나에게도 전해졌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순간을 다른 이와 공유하고 있었다. 따뜻한 햇살이, 기타 선율이 그리고 그 작은 벤치와 방금까지 낯선 이였던 애런의 미소까지. 모든 건 우연을 가장했지만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역시 세상은 살맛 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