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달콤하잖아!
그 좋은 걸 왜 포기해.”
사랑을 단념하고 싶지 않던 마음에 우스개 소리로 친구에게 말한 날, 거짓말처럼 T가 내 인생에 들어왔다.
처음 만나기로 한 날 나는 약속 시간보다 약 오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혹시나 T가 도착했을까 두리번거렸지만 T처럼 보이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기 전에 자리를 잡는 게 좋겠다 싶어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 소리가 울리고 T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 도착했는데 혹시 오셨는지요? 아니면 제가 자리 잡으려 하는데 야외석이 좋으세요, 아니면 실내가 좋으세요?”
“어디든 괜찮아요.”
중저음의 목소리가 귀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시작부터 괜스레 설레는 마음. T는 다른 사람들과 첫인상부터 달랐다. 마침 T가 약속장소로 선택한 바는 경치가 좋은 곳이라 살짝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야외테이블을 요청했다. 호스트를 따라 야외로 걸음을 옮기자 놀랍게도 공기나 너무 따스했다. 그제야 천장에 달린 히터가 눈에 띄었다. '야외테이블을 선택하길 잘했다.' 하는 마음에 걸음이 가벼워졌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나자 몸에 붙는 카키색 면바지에 자줏빛 스웨터를 입은 채로 걸어오는 T가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눈에 T를 알아보았다. 나는 손을 번쩍 들어 그에게 위치를 알리고 일어나서 T에게 가벼운 포옹을 하며 반겼다. 우리는 둘 다 환한 미소를 띠고 서로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첫 만남을 시작했다. 그 후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하다 웃고 또 이야기하다 웃길 반복 했다. 그와 내가 나눈 건 미소가 아니었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로 ‘하하’하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의 고향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나의 한국에서의 삶에 대해서 말했다. 캐나다의 삶에 대한 생각도 나누었다. 사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T와의 만남 후 나에게 남은 것은 포근한 기운, T의 따뜻한 눈매 그리고 참 많이도 웃었다는 증거인 흉측할 정도로 번진 눈 화장이었다. 헤어지는 인사를 하는 동안 T는 "만나서 좋았어요. 꼭 다시 보고 싶어요."라고 재차 말을 했다.
이틀 후 T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시 만날 생각에 지금 보고 있는 영화에 집중을 할 수 없다는 T의 문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우린 두 번째 데이트를 약속했다.
7시에 브루어리에서 만나기로 한 T는 살짝 늦고 있었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었고 T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기요, 희영씨.”
“아악!”
T가 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나는 그의 부름에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민망했던 순간도 잠시, 놀라던 내가 우스웠던지 ‘하하’ 하며 웃던 T의 웃음 소리는 즐거웠던 지난 데이트를 떠올리기 충분했다. 내 주변의 공기가 그로 가득차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이야기를 잘했고 또 잘 들어주었다. 한 명만 주요 인물이 되는 시간이 아닌, 서로가 얽히며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시간. 그렇게 우리의 4시간이 순식간에 지나버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브루어리는 거의 비어있었고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는 것마저 잊어버린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떻게 삼 일 전까지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과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던 걸까. 와인 한잔에 끊임없이 웃고 또 웃다가 정신을 차리니 이제 그 바도 폐점 시간이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에 인사를 하며 다시 웃었다. 마치 웃는 것뿐이 모르는 사람들처럼. 한때는 전남편이 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그 사람 외에 내가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약 7시간이 찰나처럼 지나가고 남은 환영이 웃음뿐이라면, 달콤한 사랑의 시작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
T와의 만남은 언제 어디에서 만나든 상관없이 똑같았다.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하염없이 웃다가 보면 직원이 와서 문을 닫아야 하니 나가 달라고 조심스럽게 언질을 주었다. T를 만나면 갑자기 세상이 뒤집어지고 우리 외의 사람은 엑스트라로 변했다. 이 세상에 T와 나만 존재했다. 마치 내가 이제 사랑을 처음 알게 된 풋풋했던 시절로 돌아가 다시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몇 번의 만남 후,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 매일 만나기 시작했다. '언젠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겠지.'라는 막연했던 기대가 현실로 이루어졌다.
사랑, 생각보다 더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