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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B Oct 20. 2020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나의 속내는 말과 상이했다. 그건 말로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글로 적고 혼잣말을 하며 몇 번이고 나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 몸짓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현실로 만들고 싶은 소망에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몸부림이었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된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었지만 그게 나에게도 적용된다고 믿기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가 너무도 컸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는 않았기에 새로운 사랑을 찾아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한두 번의 만남으로 설렘을 가질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위해 보내는 시간과 노력조차 번거롭게 느껴졌다. 만남이 이어질수록 오히려 내 마음은 더 공허해지고 서로에게 편안한 존재였던 지난 사랑이 더 생각나는 부작용을 불러왔다.



누구를 만나지 않으면 외로웠고 누구를 만나도 어떠한 기대감도 가지지 않았던 그 무렵, T를 만났다.



바람 한점 없이 고요했던 노을 아래서, T와  나는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말했다.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T는 수시로 나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오늘 하루 동안 사랑한다고 충분히 이야기했어? 너를 정말 사랑해."

그토록 바라던 사랑에 빠졌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모든 게 완벽하지는 않았다.

'다시 사랑을 하는구나!'라는 행복함과 동시에 찾아온 건 두려움이었다. 'T가 정말 나를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지금 감정이 얼마나 오래갈까?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져서 착각하는 걸지도 몰라. 어느 순간 나를 떠날 수도 있을 거야.'

나도 T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바로 뒤에 따라오는 의구심은 내가 지우고 싶다고 한들 사라지지 않았다. 전남편에서 받은 상처는 나도 모르게 T의 감정까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날도 T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띠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많이 사랑해!"

순간 내 속에 곪아있던 상처가 팡! 터져버렸다.

"그렇게 말하면 네가 평생 나만 사랑할 거라고 믿고 싶잖아. 정말 사랑해서 하는 말이긴 해? 난 이제 상처 받고 싶지 않아."

T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크게 숨을 들이쉰 그는

“난 그 사람이 아니야!”

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는 너의 전남편이 아닌데 왜 자꾸 전남편이랑 비교하는 거야! 난 그 사람이 아니라고!"

T는 온화한 말투로 나를 달래주는 대신에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T에게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가슴과 목청이 꽉 조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내 눈물을 본 T는 잠시 멈칫했으나 그뿐이었다. 사실 그가 고함을 지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수없이 되뇌고 있었지만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에 갇혀 고통스럽게 한 장본인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지난 관계로 상처 받은 나를 달래주고 어루만져줄 따스함을 찾아 T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T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을 받는 법을 알지 못했다.


T는 나의 어리석음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각인시켜주는 그의 모습에 나의 가지고 있던 의구심은 조금씩 희석되기 시작했다. 그는 수시로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며 나의 상처를 보듬어주었다.


따스함으로 얼어 있던 마음을 녹이는 것은 연인 사이의 사랑에도 적용된다.

T는 나에게 사랑받는 법을 알려주었고, 나는 이제는 이전과 같은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T와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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