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 - 이광수
이광수라는 작가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상당히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1917년에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하면서 조선을 바꾸기 위해 독립운동을 돕는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감옥에 다녀온 후로 돌연히 친일 활동을 한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그의 소설 상당히 계몽적이라 지금까지도 그의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개인적으로 정감이 가는 작가이다.
유정이라는 소설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극히 이상적이고 순수한 소설이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사회 통념이 정한 경계에 있는 교장과 학생 두 사람의 이야기다. 지금이야 학교만 졸업하면 마음을 품든 결혼을 하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지만 1930년대는 그러지 못했나보다. 선생의 위치는 하늘과 같이 높아서 감히 딸 같은 제자를 마음에 품다니.
친구의 딸이자 학교 학생인 정임, 그 학교 교장인 최석. 정임이 8살 때 부모를 잃게 되었고 그 친구인 최석이 가엾게 여겨 본인 집으로 데려와서 가족들과 함께 지낸다. 하지만 외모도 뛰어나고 공부도 잘하는 정임을 아내와 딸은 질투에 눈이 멀어버린다. 질투로 인해 정임과 최석의 관계를 의심하고 그로인해 최석이 교장자리를 나와야했다. 모두에게 비난을 받은 이 두 사람은 그들의 감정을 억누르고 제어해야만 했다. 하늘의 별이 멀리 봐서 아름답듯 이 둘의 사이도 그러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싶은 욕심을 제어한다는 것은 온 생애를 다 바쳐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미 불같이 타는 마음을 끈다고 꺼질까. 생각을 멈춘다고 멈춰질까. 옳은 길이란 도대체 뭐기에 두 사람이 평생을 아파해야할까. 우리나라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늘 주변을 의식하고 그에 맞게 결정을 한다. 그게 모두가 옳다고 말하면서. 옳다고 따라가지만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옳은 걸까? 그 길은 누가 정한 걸까. 이 두 사람은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끝없이 이어진다. 유정한 마음이란 한 평생 내 욕심을 놓고 상대를 생각하는 저릿함이다.
모든 것을 잃은 최석은 자신의 억울함을 편지로 써서 친구에게 보낸다. 그 후 시베리아로 떠나지만 어딜 가나 정임의 환영이 보이는 바람에 집에 있는 아내와 딸 순임을 생각해본다. 하지만 정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마음을 덮지 못한다. 한 편 편지를 읽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순임과 정임은 최석을 찾으러 떠난다.
책을 읽으면서 최석에게 답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원하는데 왜 마음을 억누르는지 말이다. 하지만 최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이루어지지 않아야만 완성되는 사랑도 있다. 만약 최석과 정임이 마음을 확인하고 둘이 같이 살았다면 처음과 같은 마음이 지속됐을까?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상태에서 만나면 실망도 그만큼 클 것이다.
예쁘고 성숙하다고 생각한 정임이 알고 보니 어린애 같은 모습이 많이 보인다거나 반대로 근자하고 위엄 있는 최석이 보통 남자의 생각과 다르지 않고 단지 교육계라는 틀로 그렇게 보이는 것을 안다면 처음과 같은 마음이 유지되긴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정임보다 나이가 많은 그는 혹시 그녀의 앞길을 막게 될까 쉽게 판단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걸 이겨내는 게 사랑이지만 어쩐지 이 두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서로를 그리워하고 마음에 품는 것. 여기까지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인 것 같다. 그것이 최석이 사랑을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와 그의 아내와도 처음엔 사랑이였지만 아내는 질투에 눈이 멀어 최석을 벼랑으로 몰고 최석도 노력은 하지만 마음은 이미 돌아선 것 같다. 그래서 정임을 마음에 그리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미 사랑과 결혼이라는 걸 겪었으니 짐작이 갔을 것이다. 사랑은 현실 앞에 쉽게 변질될 수 있음을. 한순간 특별해지다가도 쉽게 져 버릴 수 있는 약한 것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정임과 자신을 위해 죽음에 가기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자신을 제어 했을 것이다. 꿈에도 나오고 환영을 보면서까지 그리워하면서. 사랑은 눈에 자주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더 크고 자세하게 내 앞에 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마지막에 얼굴은 보고 얘기라도 나누고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야속하게 최석의 마지막까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가버린다. 정임은 몸이 약하기도 하지만 최석을 잃었으니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가 없는 인생을 생각했을까 싶다. 그녀의 인생은 최석이 있어야 이어지기에.
남들이 보면 외모도 능력도 출중한 그녀가 방구석에서 삶을 보내는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가끔 그녀도 그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살면서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저릿해지는 사람, 그리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절절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살면서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있기에 내 생각을 넓혀주고 내 삶을 더 풍요롭게 살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나를 놓고 싶을 정도로 힘겨울뿐. 아이러니 한 일이다.
그녀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보인다. 그래도 최석 친구의 도움으로 그들의 마지막은 평생 곁에 있을 것이다. 두 별의 무덤으로 나란히 만들 것을 염두하고 있어서. 큰 별의 앞길을 작은 별이 평생 따라가는 것처럼 그들도 먼 미래에는 그런 사이가 되길 기원한다.
유정이라는 의미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면 이런 이미지일 것 같다. 무지한 세상 속 생각이 깨어있으며 어떤 사람에 대한 마음이 가득하지만 정작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어른. 무정이라는 책을 읽어본다면 이 단어의 의미가 선명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