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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닭 Jan 11. 2019

실수가 가져오는 여백

그루지야 트빌리시 여행

  어제 교당 도서관에 잠시 들렸다가 우연히 중학생을 위한 수필집이 보여 꺼내 읽었다. 목차를 펴자마자 나희덕 시인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지라 그 자리에서 바로 읽었다.

  시인은 비구니들이 사는 암자에 하루를 묵으셨다고 한다. 부스스한 머리를 빗으려고 하는 중에 하필이면 그 날 빗을 안 가져와서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하고 계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노스님이 지나가기에 별생각 없이 빗 남는 게 있냐고 물어보셨단다. 스님의 당황한 표정을 읽은 시인은 아차 싶어서 어찌할 줄 몰라 하셨다. 스님은 활짝 웃으시며 먼지가 켜켜이 쌓인 오래된 가방 안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일화는 여기서 마무리된다.

  나희덕 시인은 악의 없는 실수는 삶과 정신의 여백에 해당한다고 썼다. 여백마저 없으면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숨을 돌리며 살 수 있겠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스님의 당황한 찰나 같은 순간에 수십 년 전 검은 머리칼이 있던 시절을 더듬는 눈빛을 읽으셨다고 한다. 시인의 실수가 산사 생활에 익숙해진 그분의 잠든 시간을 흔들어 깨웠으니 그분께 작은 보시를 한 셈이라며 스스로 위로를 하셨다.

  실수는 삶과 정신의 여백. 이 문장 하나가 내 뇌리에 강하게 꽂혔다. 나는 실수를 반대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한순간 우습게 보일 수 있으며 능력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작은 실수 하나라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다. 내 생활 전부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그려보고 반복적으로 행동해보며 실수를 절대 안 하고자 한다. 나를 쉽게 보는 게 싫어서.

  그래서 잘 지내는가? 하면 기계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감정은 자꾸 무시하고 손해나 이익을 더 따지는 것 같달까. 작은 것 하나하나 다 신경 쓰니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는다. 그래서인지 시인이 생각하는 실수의 정의가 눈에 들어온다.

  어제 시인의 수필을 읽게 된 이유도 실수에서 시작했다. 저녁에 친구랑 만나기로 했었다. 생각보다 일찍 나와서 몸 녹일 겸 도서관에 들렀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해서 읽었다.

  이상하게도 실수에 대해 마음이 넓지가 않다. 남이 하는 작은 실수도 화가 난다. 남에게도 그러고 나에게는 조금 더 심하다. 스스로 용납하지 않으니 더 완벽해져야 하는 강박에 시달리게 됐다. 내 겉모습만 봐도 표정, 자세, 행동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이러니 악의가 없는 실수조차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해버리는 것 같다. 어디론가 흘러가는 인생에 나를 완전히 맡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닐까. 조금이라도 내 계획이나 생각과 달라지면 불안해진다.

  이번 여행이 나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조지아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전날 밤에 비행기 표랑 어디 갈지 1시간 만에 정하고 예약한 숙소가 계획 전부이다. 무지에서 나오는 실수는 무진무궁할 것이다. 여백이 생긴다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우연으로 나아간다.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샤슬릭은 많이 먹어봤으니 안 먹어본 음식을 먹으려고 했는데 실수로 또 먹었다. 러시아에서 먹던 것과 미묘하게 달라서 잘 먹었다고 스스로 위쪽으로 했다. 혼자 있을 때마다 숨이 안 쉬어지는 고통은 잠깐이지만 사라졌다.

  어디 갈 계획은 없다. 사실 그렇게까지 찾아볼 체력이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여기저기 바쁘게 가기 보다 걷다가 배고프면 밥 먹고 배부르면 또 걷고 힘들면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탈 것이다. 뭘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꼭두새벽부터 나가지 않을 것이다. 뒹굴거리다가 나가고 싶으면 나갈 것이다. 이땐 뭘 하고 저땐 뭘 해야 하는 생각이 들어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도착하자마자 이런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공항에서 숙소 가면 몇 시고 체크인하면 이 시간쯤 되니까 미술관 문 닫기 전에 서둘러 둘러보고 밥 먹고 와야겠다고. 계획을 작성하고 아차 싶어서 서둘러 지웠다. 졸리니까 시내만 보고 그마저도 힘들어서 저녁 먹고 장 보고 돌아왔다. 슈퍼에서 산 3천 원짜리 레드 와인을 마시고 야경을 보면서 뒹굴거렸다. 와인은 값보다 맛이 좋아 기분도 좋다. 살찔 거라는 생각도 버리고 과자도 많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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