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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닭 Jan 12. 2019

같이 있고 싶지만 혼자 있고 싶은 날

제대로 찍는 쉼표

  카즈베기 온 후로 별다른 걸 안 하고 지내지만 8월에 해외로 온 이래로 아무 생각 없이 가장 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람의 감정은 양가적이라는 말이 맞다. 혼자 있으면 사람이 그립고 사람들 속에 있으면 혼자 있고 싶어지는 마음. 혼자이고 싶으면서 혼자 있고 싶지 않은 마음. 간사하지만 부정할 수가 없다.

  혼자 보내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의미 있게 무언가를 하지 않고 누워서 시간을 허비한다 해도 나에게 꼭 필요하다. 워낙 게으르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금방 지친다. 휩쓸리듯 지나간다고 해야 할까. 내 생각이 반영되기보단 분위기에 이끌려다니게 된다.

  올 초까지는 크루즈에서 일했고 3월부터 아르바이트를 했고 8월 말에 온 후로도 계속 혼자 있지 않았다. 난생처음 해외로 가족 여행을 2~3번 갔지만 지친 게 더 크다.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나같이 혼자에 익숙한 사람은 사람들이랑 종일 지내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더구나 사고방식이 다르다면 더 심하다. 안 그래도 감정조절이 잘 안 되고 우울 증세가 있는데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게 피곤했다.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이 절실했다.

  모스크바 이모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혼자 있어도 집안일, 장보기, 학교, 숙제, 종교 생활, 비자 이런 것들을 계속 생각하니까 온전히 나를 위해 보내는 시간은 없었다. 아파서 시간을 버린 적도 꽤 많았다. 지하철에서 책 읽고 저녁에 영화 보거나 일기 쓴 게 전부다. 이번 여행에는 모든 내 생각과 계획을 축소했다. 아무 생각 안하기, 아무것도 안하기. 지금 열심히 하는 것들이다.

  오늘은 눈이 많이 와서 날씨가 흐리다. 몸이 찌뿌둥하고 귀찮기도 하고 산에 올라가도 아무것도 안 보일 것 같아서 종일 방에서 와인 마시면서 경치를 봤다. 경치 보고 넷플릭스 돌려보고 배고프면 어제 사 온 것들 먹고. 오늘 하루 시작이자 끝이다.

  4일 숙소 3만 원 가격에 매일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처음 올 때 버스정류장에서 멀고 길이 미끄러워서 넘어지며 힘들게 왔지만, 이틀 지내니 여기보다 더 편안한 곳도 없다. 그래도 내가 여기 있는 동안 한 번 더 날씨가 맑았으면 좋겠다. 떠나기 전에 뒷산에 한 번 더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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