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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호 Jan 04. 2018

알렉산더 맥퀸과 <데미안>의
구원자_1

알렉산더 맥퀸과 이자벨라 블로우의 만남

나의 구원자


구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쪽에서 왔다.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 작용하고 있다. 
 -《데미안》, 2장 카인, 민음사


“컬렉션에 나온 코트를 사고 싶어요.”


1992년 2월,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Central Saint Martins College of Art and Design의 졸업전시회. 리 알렉산더 맥퀸Lee Alexander McQueen의 쇼가 끝나고 박수와 갈채가 어둠과 함께 걷혀든다. 한 여자가 맥퀸에게 다가가 말한다. “컬렉션에 나온 코트를 사고 싶어요.” 코트는 한 벌에 350파운드(한화 약 50만 원). 생각보다 크게 비싸지 않은 금액에 여자는 컬렉션 전부를 사들이기로 결심한다.


컬렉션이 한꺼번에 모두 팔리리라고 예상치 못한 맥퀸에게는 옷을 담아줄 변변찮은 봉투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변에 널려 있던 검은 쓰레기 봉지를 집어 실크 새틴 코트와 드레스 등 자신의 졸업 작품 컬렉션을 전부 담아 여자에게 건넸다. 컬렉션 의상 전체를 호기롭게 넘겨받았지만, 사실 여자에게도 5,000파운드(한화 약 720만 원)라는 그리 큰돈은 없었다. 일주일에 100파운드씩 총 50주, 여자가 맥퀸에게 돈을 갚느라 걸렸던 시간이다. 그렇게 리 맥퀸과 이자벨라 블로우Isabella Blow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 


이자벨라 블로우는 영국 보그Vogue의 영향력 있는 에디터다. 블로우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의 모티프가 된 미국 보그Vogue 편집장 안나 윈투어AnnaWintour의 어시스턴트로 매거진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영국 보그Vogue, 선데이 타임즈Sunday Times, 태틀러Tatler의 에디터와 디렉터로 활약하며 전 세계 패션계에 영향력을 떨쳤다. 특히 인재를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은 그녀가 영향력을 넓히는 데 한몫했다. 그녀에게 발굴된 세계적인 디자이너는 알렉산더 맥퀸뿐만이 아니다. 지방시Givenchy와 디올Dior의 전 수석 디자이너인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끌로에Chloé 전 수석 디자이너 스텔라 맥카트니Stella McCartney, 푸마Puma 전 수석 디자이너 후세인 샬라얀Hussein Chalayan, 모자 디자이너 필립 트리시Philip Treacy 역시 그녀에게 발굴되어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사진, 가시덩굴 드레스>


블로우가 반한 맥퀸의 컬렉션 주제는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였다. 잭 더 리퍼는 1888년 영국 빅토리아 시대 이스트 런던에서 다섯 명이 넘는 성매매 여성을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한 연쇄 살인범이다.  역사 속 사건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맥퀸의 작품은 화려한 재단 기교만을 뽐내는 뻔한 졸업 작품을 선보이는 다른 졸업생들의 디자인과는 달랐다. 특히 남달랐던 디자인은 살인마 잭이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넘나들던 가시넝쿨을 모티프로 한 ‘프록코트Frockcoat’다. 프록코트는 18~19세기 유럽 남성이 주로 입던 외투로, 상의 길이가 무릎까지 오는 것이 특징이다. 맥퀸은 여기에 살해당한 여성을 애도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칼을 코트 안감에 넣어 디자인했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에 머리카락을 망자를 기억하는 하나의 매개로 삼고 애도용 액세서리로 만들어 착용하고 다닌 것에서 착안했다. 잔혹한 역사에서 끄집어낸 영감을 패션으로 풀어낸 그의 착상은 그로테스크(grotesque·괴기한 것, 극도로 부자연한 것, 흉측하고 우스꽝스러운 것 등을 형용)하면서 독창적이었다. 


맥퀸의 컬렉션을 접한 블로우는 그의 재능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리고 그의 재능은 세상에 알려져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블로우가 맥퀸의 졸업 작품 컬렉션 전체를 사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개 학생에 불과했던 리 맥퀸의 졸업 작품 컬렉션이 영향력 있는 에디터인 이자벨라 블로우에게 전부 팔린 일화는 패션계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리 맥퀸이라는 신예가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결정적 사건을 블로우가 만들어준 것이다.  


블로우는 패션계 주요 인사에게 맥퀸을 소개하며 그가 업계에 확실히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맥퀸에게 블로우는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었다. 갓 졸업한 학생 특유의 거칠고 무례한 행동들을 부모가 아이 다루듯 곁에서 가르치고 보완해 주었다. 맥퀸에게 블로우는 영감을 주는 뮤즈이자 친구였고, 스승이자 인도자였다.


<사진, 이자벨라 블로우와 알렉산더 맥퀸>


알렉산더 맥퀸에 대해 얘기하는데 자꾸 리 맥퀸이라고 해서 어색하다고 느낀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 맥퀸은 본래 리 맥퀸에서 시작됐다. 블로우가 판단하기에 리 맥퀸이란 이름은 임팩트impact가 없었다. 흔하고 특징 없는 성씨인 리Lee 대신 미들 네임Middle name인 알렉산더Alexander로 대체하면 브랜드 명을 소비자에게 확실히 각인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위대한 정복자’라고 불리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대왕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현대식 발음인 알렉산더에서 주는 강렬함이 브랜드 이미지와 닮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전략은 유효했고, 알렉산더 맥퀸은 전 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뿜어냈다. 


당시 언론과 대중은 리 맥퀸도 알렉산더 맥퀸도 아닌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이라고 불렀다. 무서운 아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표현은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잃지 않으며 매 컬렉션마다 참신하고 다양하며 문제의식까지 드러내는 극단적이고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패션에 녹여낸 그에게 보내는 찬사다. 


가난한 노동자 계층의 보조 재단사에서 블로우를 만나 디자이너로 성장한 지방시 수석 디자이너이자,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의 수장이었던 리 알렉산더 맥퀸의 행보는 헤르만 헤세HermannHesse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Sinclair의 궤적과 닮아있다. 무명의 예술 대학 졸업생을 패션계의 중심으로 이끌어준 이자벨라 블로우는 싱클레어의 구원자 '데미안'의 역할을 한다. 

싱클레어는 구원자 데미안Demian을 만나 자신을 괴롭히던 악의 세계의 프란츠 크로머에게서 벗어나며 선과 악의 진실을 알아갔고,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하게 된다.  



개성의 경계_플럭서스*

*Fluxus·변화, 움직임’을 뜻하는 라틴어로 예술 장르의 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는 전위예술 운동


우리는 우리의 개성의 경계를 늘 너무나도 좁게 긋고 있어! 우리는 늘, 우리가 개인적이라고 구분해 놓은 것, 상이하다고 인식하는 것만 개성이라고 생각해. 
- 《데미안》, 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민음사


1993-1994F/W(Fall/Winter) 맥퀸은 드디어 첫 단독 컬렉션을 연다. '택시 운전사Taxi Driver를 주제로, 패션 산업에서 노동자 계층의 디자이너로서 견뎌내야 했던 정신적 좌절감과 소외를 표현했다.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영화 <택시 운전사>와 실제 택시 운전기사였던 아버지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패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범스터Bumster’라는 표현을 들어봤을 것이다. 맥퀸의 첫 컬렉션에서 탄생한 범스터는 밑위(허리선부터 엉덩이 부위 아래 선)가 극도로 짧은 치마와 바지를 의미하는데, 실제로 엉덩이 골이 훤히 보이는 아슬아슬한 옷이다. 1970~1980년대 유행했던 밑위가 짧은 로 라이즈Low rise팬츠를 연상케 하는 파격적인 무대를 꾸몄다. 맥퀸을 상징하는 의상으로 초창기 그의 컬렉션에 범스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단 한 번의 컬렉션으로 맥퀸은 대중에게 선동적이고 전위적인 디자이너라는 인식을 심었다.


<사진, 엉덩이 보이는 범스터 팬츠>


맥퀸에게 패션은 메시지 표현의 도구였다. 매 시즌 패션계에 의미 있는 주제를 파격적으로 선보이며, 옷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무대 연출과 독특한 구성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가령, 사회가 개인의 개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성찰하는 의미로 오래된 공장 창고를 무대 삼아 암울한 무채색 컬러의 옷과 힘 빠진 모델의 워킹으로 표현한다. 


1999년 S/S ‘No. 13’ 컬렉션 무대는 맥퀸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며 어떻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가장 잘 드러난다. 


런웨이에 다리를 절룩이며 조금은 어색한 워킹을 하는 모델이 걸어 나온다. 곧추 세운 허리와 길게 뻗은 다리 모양을 상상한 관객에게는 무대 위 모델의 모습은 생경하다. 무대 위의 모델은 에이미 멀린스AimeeMullins였다. 그녀는 《피플People》지가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선정된 인물로, 날 때부터 종아리뼈가 없어 한 살 때 두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1996년 여름 애틀랜타Atlanta 패럴림픽(Paralympic Games·장애인 올림픽)에서 미국 국가대표로 100미터, 200미터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며 금메달 3개를 획득하며 주목받았다. 맥퀸이 선물한 벚나무를 조각해 수공예로 만든 일체형 의족을 착용하고 컬렉션 첫 모델로 등장한다. 그녀를 알아본 관객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과연 20세기 최고의 무대로 손꼽힐 만하다. 지금은 파격이 난무하는 컬렉션이지만 당시 이런 방식의 컬렉션은 혁신이었다. 


<사진, 의족을 하고 무대에 오른 에이미 멀린스>


피날레 모델은 전직 발레리나 샬롬 하로우Shalom Harlow. 그녀는 셔틀콕(shuttlecock·배드민턴 공)을 연상시키는 가볍고도 풍성한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런웨이 중앙의 원형의 무대에 섰다. 무대 양 옆에는 자동차 공장에서나 볼법한 로봇 팔 모형의 기계가 설치되어 있다. 그녀가 그곳에 멈춰 서자 무대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봇팔 모형의 기계에서 페인트가 뿜어져 나온다. 그녀는 기계 문명을 상징하는 로봇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제자리에서 손을 뻗어 페인트를 막아보려 한다. 하지만 모델과 드레스는 사방으로 뿌려지는 페인트를 맞이한다. 순백의 드레스에 페인트가 무질서하게 뿌려지고 쇼는 그대로 끝이 난다. 옷이 무대 위에서 완성된 것이다.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관객의 무한한 환호를 이끌어 내며, 20세기 패션쇼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무대로 회자되고 있다.


‘옷은 완성품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기 위해, 관객들이 보는 가운데 무대 위에서 옷을 완성시킨 그의 시도는 패션은 죽은 것이 아닌 ‘살아있는 것’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개성의 경계를 뛰어넘은 패션계의 큰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된다.


<사진, 샬롬 하로우가 입은 드레스 위로 페인트가 뿌려진다. >


맥퀸은 끊임없이 기성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놓은 패션의 정의를 깨부수는 시도를 한다. 

마이너한 단조의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소리가 낮게 깔린 무대 위, 조명은 초 단위로 꺼졌다 켜지는 것을 반복한다. 스킨헤드skinhead 헤어스타일을 한 만삭의 임산부가 드레스를 입고 런웨이에 등장한다. 모델을 보고 놀란 객석의 패션 관계자들은 의미를 해석하고 사진을 남기기에 정신없다. 잠깐의 분주함이 지나고 관객들은 이어지는 모델의 워킹을 하나라도 놓칠 세라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본다. 시작부터 강렬한 인상을 던져준 맥퀸은 죽음을 상징하는 정령인 ‘밴시Banshee’의 이미지를 드라마틱하게 가공한다.


맥퀸의 두 번째 컬렉션인 1994-1995 F/W의 주제인 밴시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민화 속 정령으로, 헝클어진 긴 머리에 녹색이나 적색 옷을 입고 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끔찍하게 생긴 노파의 모습으로 나타나 가족의 죽음을 울음으로서 예고한다고 전해진다. 이때 울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데 죽음을 슬퍼하여 흐느껴 울거나,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른다. 혹은 손뼉을 치며 울부짖기도 하고, 박쥐가 내는 소리를 내면서 밤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상상만으로도 암울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연상되는 밴시가 런웨이를 걸어 다닌다.


맥퀸의 컬렉션이 특별한 이유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 메시지 외에 또 다른 두 번째 메시지도 함의하고 있는 데 있다. 밴시는 죽음을 알리는 정령일 뿐만 아니라, 아기의 탄생을 알리거나 가장이 될 아이의 요람을 지켜보기도 하는 탄생의 의미를 지닌 정령이기도 하다. 밴시가 지닌 이중적 의미는 죽음과 대척점에 있는 임산부를 모델로 삼고 미망인을 떠오르게 하는 블랙 드레스를 통해 표현된다. 


가슴 부분이 잘려 유두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니트웨어 차림의 모델, 중세시대 갑옷처럼 가슴 보호대 모양을 한 석고 몰드의 상의를 입은 모델, 엉덩이 골이 노골적으로 보이는 범스터 팬츠와 스커트를 입은 모델이 무대를 오간다. 독특한 의상과 음산한 분위기를 묘사하며 규격화된 미美를 추구하는 기존 패션계의 암묵적인 룰을 조롱한다. 맥퀸을 이를 통해 ‘기존 패션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사진, 임신한 모델이 검은 시스루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다>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두면 좋다. 그것은 현재의 당신을 만든다."
It's good to know where you come from. It makes you what youare today 
- 리 알렉산더 맥퀸Lee Alexander McQueen


맥퀸은 역사 속에서 컬렉션 주제를 찾았다. 스코틀랜드계 혈통인 맥퀸은 자신의 가족사를 증조부가 살던 시대로 확장시켜 19세기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컬렉션에 담는다. 1995-1996 F/W '고원의 강간Highland Rape'은 19세기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대상으로 잔혹한 인종 학살을 자행한 사건을 주제로 삼았다. 컬렉션 제목에 사용한 ‘강간Rape’은 스코틀랜드의 짓밟힌 역사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단어다. 맥퀸은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대표하는 타탄tartan 체크와 마구잡이로 절개되고 찢어진 레이스를 주요 소재로 삼는다. 옷은 군데군데 찢겨 있고 신체 중요 부위를 가리고 보호하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채 런웨이에 오른다. 


고원Highland에서 짓밟힌 모습을 상징하기 위해, 무대 위에는 나뭇가지들이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다. 모델의 붉은 헤어는 불행한 역사의 피를, 눈 주위를 검게 칠한 과한 메이크업은 그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음을 알려준다. 모델은 두 팔과 다리를 크게 휘저으며 쿵쾅 소리와 함께 무대를 가로지르는가 하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맥없이 워킹하기도 한다.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검투사 갑옷과 제복 군인 모자와 같은 액세서리를 착용한 모델이 등장한 뒤에는 그에 짓밟혀모든 것을 잃은 듯 갈기갈기 찢어진 복장을 한 모델이 등장한다. 모델의 등장 순서를 내러티브 형식으로 삼아 역사 속 사건을 보여주었다. 요란한 종소리가 무대에 뿌려지고, 이소리는 알람alarm 역할로 지난 역사에 대한 분노를 표현해야 하는 시간임을 알린다.


<사진, 타탄체크 드레스>


기존의 형식을 파괴한 최초의 시도는 1994년 S/S 시즌 두 번째 쇼에서였다. 묵직한 펑크Funk 음악과 잿빛으로 물든 쇼장에 모든 조명이 꺼지고 무대만이 조명된다. 관객의 시선은 순식간에 무대 위로 걸어 나오는 모델에게 꽂힌다. 머리카락을 부스스하게 늘어뜨리거나 과감히 세운 모델들의 얼굴에 발린 화장품은 모두 번져있다. 워킹 자세도 이상하다. 모델의 상징인 킬힐killheel 대신 맨발로 무대에서 취한 듯 비틀거리며 걷는다. 우리가 알던 런웨이와 다르다. 암묵적으로 규정된 패션쇼의 규칙을 깨버린 모델들의 워킹은 맥퀸의 의도이자, 컬렉션의 주제 ‘니힐리즘(Nihilism·허무주의)’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풀어낸 결과다. 


맥퀸은 허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격렬하게 저항한다. 피가 튀고 오물이 묻은 의상을 선보이거나, 둔부와 가슴 등 성sex을 상징하는 신체 부위를 노출하는 시스루(see-through·피부를 살짝 비쳐 보이는 패션으로 망사, 레이스와 같은 소재를 사용) 의상을 선보인다. 투명한 비닐로 감싼 드레스 위에 붉은 페인트를 뿌려 선혈이 낭자한 사건 현장을 연상케 한다. 시체를 감싼 듯 온몸을 칭칭 감아 괴기한 분위기를 풍기는 드레스 또한 기존 패션의 죽음을 선언하며 허무를 더욱 부각한다. 


맥퀸의 컬렉션은 ‘옷은 그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존재하는 사람의 가치 없이는 패션 또한 무의미하다는 자신의 가치를 쇼를 통해 설파한다. 우아하고 고귀한 것만을 추구하는 하이엔드high-end 브랜드가 만들어 놓은 패션쇼의 규칙을 파괴하려는 맥퀸의 시도는 그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계속>


알렉산더 맥퀸과 <데미안>의 구원자_2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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