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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호 Jan 11. 2018

알렉산더 맥퀸과 <데미안>의
구원자_2

맥퀸의 마지막 옷

알렉산더 맥퀸의 지방시


1996년, 알렉산더 맥퀸은 존 갈리아노가 빠진 지방시Givenchy에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된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지방시는 1951년 위베르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에 의해 설립되어 안정감 있으면서도 절제된 우아함을 추구한다. 1993년 패션 대기업 LVMHLouis Vuitton, Moët &Chandon, Hennessy에 인수된 지방시는 우아한 여성미만을 강조했던 브랜드 이미지에 변화를 주고자 ‘앙팡 테리블’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단 7 회의 컬렉션을 선보인 27세의 신예 디자이너에 불과했던 맥퀸을 지목한 지방시의 결정은 패션계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21세 때 파리 최고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Haute couture 크리스찬 디올에 입성한 장면과 교차되며, 세계적 명품 브랜드가 어떻게 인재를 영입하고 브랜드를 키워나가는지 엿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맥퀸에 대해 당시 패션계에서는 재단사 출신답게 테일러링tailoring에 기반한 정확한 재단을 구사하면서도 과감하고 즉흥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는 전위적인 디자이너로 평가하고 있었다. 파리지앵의 절제된 이미지가 떠오르는 지방시의 우아함과는 거리가 있는 맥퀸의 성격은 경직된 지방시 아틀리에에 큰 변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이 베아트리체 예배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어제만 해도 조숙한 냉소주의자였는데, 나는 지금 성인聖人이 되겠다는 목표를 지닌 사원의 하인이었다. 나는 내가 익숙했던 평범한 삶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바꾸려 했다.
- 《데미안》, 4장 베아트리체, 민음사


지방시 영입은 맥퀸에게도 기회였다. 이제 막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던 신예 디자이너에게 지방시라는 명품 브랜드는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발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앙팡 테리블로 불리던 맥퀸마저 지방시 입성 초기 자신의 패션 철학과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성 사이에서 방황했다. 지방시에서 나름의 파격적 스타일을 선보이긴 했지만 보수적인 지방시 브랜드 색깔을 맞춰가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지방시는 맥퀸이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쌓고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은 분명했다.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를 만나 익숙했던 삶을 바꾸려 했던 것처럼, 맥퀸 역시 자신의 몸을 지방시라는 옷에 맞추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맥퀸의 처지는 마치 들판을 내달리던 야생마가 울타리 쳐진 농장에 갇혀 있는 꼴이었다. 맥퀸 역시 지방시 시절을 회고할 때면 “나는 지방시를 푸대접했다. 그건 단지 나에게 돈이었다. I treated Givenchy badly.It was just money to me.”라고 말했다. 그가 고집하는 패션에 대한 철학과 표현은 지방시라는 규격화된 기성 브랜드 안에서 꺾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이엔드 브랜드 수장으로 인지도와 자금을 확보하며 자신의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 을 운영하기 위한 기반을 쌓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기에 견뎌야만 했다.


불만과 어려움은 많았지만 맥퀸은 지방시의 경직된 컬러를 바꾸는 데 성공하며 1996, 1997년 영국 패션협회BCF가 선정하는 올해의 디자이너 상을 수상한다. 브랜드 수장으로서 4년 반 동안 매년 시행했던 오트 쿠튀르와 기성복 컬렉션을 진행한 그의 패션쇼는 단순히 의상만 선보이는 자리가 아니라 행위 예술과 설치 예술의 사이를 오갔다. 움직이는 무대에 조명과 회전 장치를 설치해 모델 없이 마네킹만으로 패션쇼를 구성하기도 하고, 정글로 꾸민 무대에서 말을 탄 모델을 등장시키기도 하며 쇼와 의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지방시 하우스에 맥퀸의 색깔을 더하며 브랜드의 재건을 이룩했지만, 그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맥퀸 특유의 파격성을 선보이려 노력했지만, 컬렉션은 열렬한 환호를 받지 못했다. 그는 보그vouge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지방시에서의 첫 컬렉션을 “형편없다Crap”고 자평했다. 지방시와 본인의 브랜드를 합쳐 1년에 6개의 컬렉션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데 집중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방시에서의 5년은 맥퀸이 독립된 디자이너로서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테일러 출신인 맥퀸은 옷의 구조와 건물을 짓듯 정확한 재단에 대한 이해도는 높았지만, 상대적으로 여성복 특유의 러플ruffle과 레이스 소재를 활용한 부드럽고 우아한 라인에 대한 이해는 적었다. 지방시 아틀리에는 브랜드 역사성을 함께하는 장인의 손길을 통해 그의 부족함을 채워줬고, 딱딱하고 거친 성향을 다듬어주었다. 이 시기는 맥퀸의 광기가 고도로 정밀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시기였다고 평가받는다.


누구든 한 번은 자신을 아버지로부터, 스승들로부터 갈라놓는 걸음을 떼어야 한다.
누구든 고독의 혹독함을 조금은 느껴야 한다.   
- 《데미안》, 6장 야곱의 싸움, 민음사 


2000년 12월 구찌Gucci 그룹이 ‘알렉산더 맥퀸’ 브랜드 지분51%를 인수하면서, 맥퀸은 지방시를 떠나 구찌 그룹의 새로운 파트너가 된다. 이후 세컨드 라인인 맥큐McQ와 향수 브랜드인 마이 퀸My Queen을 론칭하며 브랜드를 확장시켜 나간다.


지방시에서 독립한 맥퀸은 한층 더 강렬하면서도 견고한 자신만의 패션 철학과 주제의식을 드러냈다. 독립 후 첫 컬렉션인 2001년 파리 패션위크에서의 행보가 대표적이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테러 사건 직후 많은 디자이너들은 애도의 의미를 담아 쇼를 취소했다. 그러나 맥퀸은 자신만의 패션쇼를 강행한다. 그는 “패션은 정치적으로 맞춰나갈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패션은 혁명적일 수 없고, 나는 내가 늘 하던 것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패션은 정치, 경제, 사회 논리에 의해 지배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후 2001년, 2003년 영국 패션협회BFC, 2003년 미국 패션협회CFDA에서 주는 올해의 세계 디자이너상을 수상하며 그는 영국 패션의 아이콘이 된다. 



이자벨라 블로우의 죽음


맙소사, 이제 곧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안정되고 다정한 발걸음이 집 안을 거니는 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할 것이며 내 책상 위에는 그녀의 꽃이 더 이상 없으리라.
- 《데미안》, 8장 종말의 시작, 민음사


대중과 패션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브랜드를 이끌던 맥퀸은 그의 뮤즈 이자벨라 블로우의 자살로 삶의 변곡점을 맞이한다.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나 사랑을 느끼며 행복을 맛보다 전쟁으로 인해 익숙한 것들과 헤어짐을 맞이해야만 한 것처럼 말이다.  


2007년 5월 7일, 난소암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던 블로우는 48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음독자살을 택한다. 맥퀸은 자신이 패션 업계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이끌어준 멘토이자 뮤즈가 세상을 떠나 심각한 우울증을 앓게 된다. 


맥퀸은 블로우 헌정 컬렉션을 꾸민다. 2008년 S/S 컬렉션 ‘블루 레이디La Dame Bleue’는 이자벨라 블로우를 상징하는 '새'를 테마로 구성했다. 그녀는 평소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과도한 디테일이 들어간 모자와 액세서리를 즐겨 착용했다. 깃털, 가재, 망사, 자신의 이름, 왕관 등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독특한 의상을 떠올리게 하는 특이한 모자들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중 그녀가 가장 애용했던 모티브가 바로 ‘새’다. 그녀가 애정 했던 소품을 중심으로 맥퀸은 쇼를 구성한다. 


<사진, 이자벨라 블로우를 상징하는 모자, 컬렉션 사진>


천국을 상징하는 하늘로 날아가는 날개 형상의 무대 배경에서 쇼가 진행됐다. 그녀의 죽음에서 많은 걸 배웠다는 맥퀸은 생전 그녀가 좋아했던 모자를 컬렉션 메인 아이템으로 활용한다. 


빛이 반사되는 런웨이 끝에 거대한 날개 형상의 네온 조명이 날갯짓을 하자 블로우가 사랑했던 독특한 모자를 착용한 모델이 등장한다. 컬렉션 의상은 대부분 어깨 위에 성을 쌓은 듯 과장된 파워 숄더다. 어깨를 양 꼭짓점 삼아 타이트하게 졸린 허리로 향하는 상의 라인은 모래시계 같은 구조를 띄고 있다. 낙원의 새를 상징하는 깃털 형상의 어깨 장식을 한 모델, 일본의 검도 도구인 호구 투구를 그대로 쓴 모델이 걸어 나오기도 한다. 블로우가 직접 발굴하고 지원했던 모자 디자이너 필립 트레이시의 거대하고 화려한 모자와 맥퀸의 의상이 한 무대에서 조화를 이룬다. 우아하면서도 풍성함을 강조한 칵테일 드레스와 일본식 가운을 선보인 컬렉션은 평소 블로우가 좋아했던 취향을 적극 반영한 작품이다. 뮤즈였던 이자벨라 블로우의 죽음을 추모하는 방식 또한 ‘맥퀸스러웠다’. 



맥퀸의 마지막 옷


(Blow'spassing) “just left a big void in my life.”
(이자벨라 블로우의 죽음은) "내 인생에서 큰 공허함을 남겼다."   
- 리 알렉산더 맥퀸LeeAlexander McQueen


이자벨라 블로우의 자살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맥퀸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블로우가 자살한 지 3년이 지난 2010년 맥퀸의 또 다른 정신적 지주인 어머니 조이스Joyce가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어머니와는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입지를 쌓은 후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맥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치러지기 하루 전, 맥퀸은 런던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다. 블로우의 죽음 이후 심각한 우울증을 앓던 중 어머니의 죽음이 겹쳐져 견딜 수 없는 중압감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맥퀸이 스스로 목숨을 저버린 날 오후에는 맥큐McQ의 패션쇼가 예정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트위터에 알리며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라고 말한 것처럼, 2010 F/W ‘알렉산더 맥퀸’ 컬렉션 역시 다음 달 파리에서 선보 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삶은 지속되지 못했고, 예정되어 있던 컬렉션 의상은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사진, 마지막 컬렉션 의상>


맥퀸의 마지막 컬렉션 작품은 비장하면서도 엄숙함이 느껴진다. 금빛 깃털에 둘러싸인 재킷과 풍성하면서 우아한 화이트 드레스는 싱클레어가 애정한 ‘에바 부인’을 연상시키기도 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의 모티브인 '새'의 형상은 알을 깨고 압락사스에게 날아가고 싶었던 싱클레어와 맥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나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내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조금씩, 그러나 결코 줄어들지 않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 《데미안》, 8장 종말의 시작, 민음사


영국 패션협회BFC는 런던 패션위크를 맥퀸을 위한 묵념으로 시작한다. 그의 마지막 컬렉션은 저명한 패션 매거진 편집장 10명 정도만 초대해 작은 규모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진행되었다. 대중 앞에 나서기 꺼렸던 내성적인 그의 성향을 배려한 진행 방식이었다.


알렉산더 맥퀸의 죽음 이후 그의 수석 어시스턴트였던 사라 버튼Sarah Burton은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다. 그녀는 맥퀸이 생전 마지막으로 작업하던 컬렉션을 마무리 지으며 브랜드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고, 그의 패션 명맥을 이어 현재까지 브랜드를 이끌고 있다.




알렉산더 맥퀸


<사진, 알렉산더 맥퀸>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영국, 패션 디자이너

출생/사망 : 1969년 3월 17일 출생 / 2010년 2월 11일 사망

학력: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 패션디자인 석사 

수상: 2003년 미국 패션협회CFDA 올해의 세계 디자이너 

        1996, 1997, 2001, 2003년 영국 패션협회BFC 올해의 디자이너

경력: 알렉산더 맥퀸Alecander Mcqueen 수석 디자이너

        1996년 ~ 2001년, 지방시Givenchy수석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은 1969년 런던 이스트 엔드East end에서 택시 운전사의 아들로 태어난다. 16세에 학교를 떠나 런던의 초고급 맞춤 양복점의 산지인 세빌 로(Savile row·런던의 고급 수제 양복점이 늘어서있는 거리를 통칭, 세계 유명 인사는 물론 영국 왕실 귀족이 주요 고객)의 코트 전문 테일러 샵에서 견습생 일을 시작한다. 디자이너로서 첫 발자국이다. 직접 디자인을 하지 않았지만, 밑바탕이 되는 재단 기술과 테일러링을 익히는 기간이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재단사로 일을 했고, 1994년 영국으로 돌아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에 입학 지원한다. 학교의 패턴 튜터로 지원했지만 그의 포트폴리오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학교 측의 권유로 석사과정Head of Mastercourse에 등록하게 된다. 패션 명문학교에서의 석사과정은 그가 패션계의 메인 스트림에 오를 수 있는 큰 계기이기도 했다. 졸업 작품에서 강렬한 작품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은 후 몇 번의 단독 컬렉션을 연다. 그의 컬렉션을 두고 패션계에서는 악동, 천재, 쓰레기 등 수많은 수식어를 던지며 관심을 쏟아냈고, 1996년 패션 대기업 LVMHLouis Vuitton, Moët & Chandon, Hennessy 그룹 소유의 지방시 수석 디자이너가 된다. 지방시를 나오고 나서도 그의 단독 브랜드를 꾸준히 전개해 사랑받지만, 일련의 비극적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2010년 2월 11일,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데미안


<사진, 헤르만 헤세>


《데미안》은 1919년 헤르만 헤세Hermann Gesse(1987~1962, 독일)가 발표한 소설이다.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이기도 한 '에밀 싱클레어'라는 익명의 이름으로 발표했으나, 문체가 헤르만 헤세의 것과 같다는 것이 알려져 추후 헤세는 자신의 저서임을 밝힌다. 


스토리 요약

여유 있고 따뜻한 부모님 아래 ‘선의 세계’만을 알았던 주인공 싱클레어. 그는 동네에서 악행을 저지르던 소년 프란츠 크로머를 만나 ‘악의 세계’를 알게 된다. 그런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신비한 소년 데미안. 그는 싱클레어를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악의 세계’에서 꺼내 주고, 성서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의 진실에 대해 하나씩 알려준다. 내면의 선악 사이에서 고뇌하던 싱클레어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거리로 나가 금지된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어두운 내면을 이겨 낸다.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의 초상화를 그리지만, 그 초상화는 어느새 데미안과 닮아있다. 데미안에 대한 동경, 강렬한 그리움이 베아트리체 초상화에서 데미안을 보게 한 것이었다.


대학생활 중 싱클레어는 우연히 데미안을 다시 만나고,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난다. 데미안과 재회 이후, 싱클레어는 내면에 존재하던 이상적 여인은 바로 에바 부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에 참전한 싱클레어는 부상을 입고 데미안과 야전 병원에서 대화를 나눈다. 자신이 필요할 때면 자기 안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을 남긴 데미안은 다음 날 사라진다. 깨어난 싱클레어는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데미안과 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전편을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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