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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호 Feb 10. 2018

<행복한 왕자>
재봉사의 새틴 드레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에서 꺼낸 옷

작품보다 수많은 명언으로 유명한 인물이 있다.

바로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다.

 

짧은 문장 속 굵직한 한 방을 담고 있는 그의 명언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문, 등본을 떼러 들른 동사무소 서가 어딘가에 꽂혀있는 <좋은 생각> 한 구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정한 삶은 지금까지 누구도 살지 않았던 삶이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비극이며,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는 비극이다.”

“여자를 사랑하려 해야지,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지는 명언들이다.

 

당대 최고의 사교계 총아,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던 유미주의자, 시대의 이단아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19세기 영미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시인, 극작가다. 그에게 붙는 수식어가 긴 이유는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활동 영역 덕분이다. 하지만 경계를 너무 훌쩍 넘나든 탓일까. 그는 미성년자와 동성애 혐의로 기소되어 2년간 감옥살이도 하게 된다. 역시 예술가의 예술 같은 삶이다.

 

자신의 일면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 같은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있지만, 이번 편은 그 대척점에 닿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동화로 꼽히는- <행복한 왕자>다.

 

“저 멀리 좁은 거리에 가난한 집이 하나 있어. 창문 하나가 열려 있어서 여자가 탁자에 앉아 있는 게 보여. 여위고 시든 얼굴이야. 손은 빨갛고 거칠어. 온통 바늘에 찔렸거든. 여자는 재봉사야. 왕비의 가장 예쁜 시녀가 다음 궁정 무도회에서 입을 새틴 드레스에 시계풀을 수놓고 있어.”
-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中 행복한 왕자, 민음사

 

‘행복한 왕자 조각상’은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있는 우뚝 서 있다. 그곳에서 도시의 추하고 비참한 모습을 바라본다. 따뜻한 나라로 가지 못한 제비가 동상 위에서 쉬다가 행복한 왕자의 눈물을 발견하고, 행복한 왕자의 부탁을 들어준다. 위 장면은 여위고 시든 얼굴로 궁정 무도회에 입을 새틴 드레스에 시계풀을 놓고 있는 재봉사의 모습을 왕자가 제비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가장 화려한 순간에 입을 귀족의 옷을 가장 너절한 환경의 재봉사가 수놓고 있는 모순적인 장면이다. 동화는 이러한 장치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행복한 왕자>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번영한 시기였으나, 그 화려함 이면에 숨겨진 빅토리아 시대의 어두운 면을 왕자 조각상과 제비라는 동화적 설정을 통해 보여준다.

 

왕자가 말하는 첫 오브제는 새틴 드레스다.

새틴Satin은 광택이 도는 매끄러운 소재를 뜻한다. 새틴은 본래는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크 섬유로 짰으나, 지금은 여러 인조 섬유로 만들어진다. 물론 동화 속 수놓는 새틴 드레스는 실크로 짰으리라. 새틴은 표면이 매끄럽고 부드럽지만 질기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새틴은 주로 드레스, 블라우스, 스카프, 옷의 안감으로 쓰인다. 빨갛고 거친 손의 재봉사는 이러한 새틴으로 만든 드레스에 시계풀을 수놓고 있다.

 

<바느질 여공, 리처드 레드그레이브 Richard Redgrave, 1844>

 

1837년~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에 영국은 산업 혁명으로 경제 발전이 성숙기에 도달한다. 부를 쌓은 사람들이 늘어났고, 일반적인 옷차림으로는 신분을 구분 짓기 어려웠다. 경제력을 갖춘 신흥 부유층들은 각자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장신구와 값 비싼 옷으로 치장했다. 심지어 동화 속 왕비의 시녀도 무도회에 참석할 때 고급 소재의 드레스를 입을 수 있을 정도다.

 

“궁정 무도회 때까지 내 드레스가 완성되었으면 좋겠어요.” 여자가 대꾸했다. “드레스 위에 시계풀을 수놓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재봉사가 너무 게을러요.”
-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中 행복한 왕자, 민음사

 

번영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가난한 재봉사는 드레스에 시계풀을 수놓고 있다. 여기, 드레스에 수놓는 문양에도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시계꽃, 시계초 또는 시계풀로 불리는 Passion flower은 ‘수난의 꽃’으로도 알려져 있다. Passion이면 열정, 정열의 꽃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보듯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암술머리가 십자가 모양이고, 방사상의 부화관이 예수가 썼던 가시면류관처럼 생겼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계풀을 '고난의 꽃' 또는 '수난화受難化'로 부르기도 한다

 

<사진, 시계풀 패턴>

 

이렇듯 빅토리아 시대에 시계풀이 수 놓이는 새틴 드레스는 재봉사로 상징되는 하층 계층의 고통으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높은 곳에서 하층 계층의 고통을 본 행복한 왕자(계속 말하지만, 행복한 왕자란 이름부터가 모순적이다)는 제비에게 부탁해 검의 손잡이에 붙은 루비를 빼서 재봉사에게 전달한다. 행복한 왕자는 가난한 작가와 성냥팔이 소녀, 굶주린 아이에게 눈에 박혀있는 사파이어와 몸을 덮고 있는 금 조각을 모두 나눠준다.

 

행복한 왕자의 모습은 점점 초라해지고, 심부름을 하던 제비는 추운 날씨에 죽게 된다. 이를 본 시의원들은 볼품 없어진 행복한 왕자 동상을 녹여 없애버리기로 한다. 이때 하느님이 천사에게 도시에서 가장 귀한 두 가지를 가져오라 명한다(갑자기?). 천사는 행복한 왕자의 쪼개진 납 심장과 죽은 제비를 하느님에게 바치고, 그들은 천국에서 행복하게 사는 내용으로 동화는 끝이 난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겠지만, 우리 모두 어디선가 봤을 아름답고 교훈적인 동화의 내용이다.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훈훈한 결말 클리쉐도 익숙하다.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익숙한 작가였다. 이제 어디 가서 오스카 와일드를 좀 아는 척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멋진 말 중 하나로 <행복한 왕자> 속 새틴 드레스 편을 마친다.

 


“예술은 드러내고 예술가는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ps. “하지만 꼭 내 입에 키스를 해 주렴. 나는 너를 사랑하거든.” 제비는 행복한 왕자의 입에 키스를 하고 왕자의 발 밑에 떨어져 죽는다. 원작에서 제비는 he로 표현된다. (당연히) 남자인 왕자와 수컷 제비의 키스로 비극은 끝이 난다. 동성연애를 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을 다시 한번 새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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