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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호 Mar 18. 2018

<대성당> 로버트의-쓰지 않은-검은 안경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서 꺼낸 옷

아내의 오랜 친구가 집으로 찾아온다. 그는 맹인이다.

  

그러니까 맹인이, 아내의 오랜 친구가 하룻밤 묵기 위해 찾아오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죽었다.  
- <대성당>, 문학동네

  

레이먼드 카버의 대표 단편집 <대성당>의 첫 문장은 다비도프 쿨워터 향처럼 쿨내 진동한다. 그의 문장은 마치 터프한 헤밍웨이의 문체와 닮아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국의 안톤 체호프로 불리는 카버를 문학적 스승으로 여기며 그의 전집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설가 김연수가 직접 번역을 맡을 정도니, 말 그대로 작가의 작가, 연예인의 연예인인 셈이다.  

카버의 단편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 단편 소설집의 제목으로도 쓰인 <대성당>은 맹인 친구의 방문으로 쿨 내 나는 문장으로 탑노트를 장식한다. 탑 노트의 첫 향에 취하기 전에 그나저나, 맹인과 대성당은 무슨 조합이지 싶다. 그렇다면 고딕스러운 제목과 하드보일드 한 첫 문단의 생경함에 물음표를 지닌 채 책 읽기를 시작할 수밖에.

  

아내는 십 년 전, 맹인-로버트-에게 책 읽어 주는 일을 한다. 그녀는 사례연구, 보고서 등을 그에게 읽어줬고, 그가 맡고 있던 카운티 사회복지국 내 작은 사무실의 운영을 돕는다. 그녀는 이제 막 임관한 공군 소위와 결혼해 시애틀을 떠나며 맹인과의 일을 그만두게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카버의 문장을 따라 써봤다) 일을 그만뒀지만 그녀는 로버트와 녹음된 테이프를 주고받으며 삶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군인인 남편을 따라 떠다니는 삶을 살던 그녀는 외로움을 느끼고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다. 죽는 대신 아프기만 했던 그녀는 전 남편과 헤어지며 화자인 주인공과 결혼하게 되었고, 테이프를 주고받으며 십 년이 지난 오늘, 아내는 로버트를 집으로 초대한다. ‘나’는 아내의 맹인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게 왠지 불편하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내가 개인적으로 알거나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맹인은 건장한 체격에 머리는 벗어지고 등에 짐이라도 짊어진 것처럼 어깨가 구부정한 사십 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는 갈색 슬랙스에 갈색 신발, 밝은 갈색 셔츠, 넥타이, 스포츠 재킷을 입고 있었다. 멀끔멀끔. 또한 예의 그 덥수룩한 턱수염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팡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검은 안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항상 맹인들에게는 검은 안경이 필수품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사람도 그런 안경을 썼으면 싶었다.  
- <대성당>, 문학동네

  

왜 검은 안경을 안 썼지? ‘나’는 맹인들에게 검은 안경이 필수품이라고 생각한다. 지팡이도 없고 검은 안경을 쓰지 않은 맹인을 보는 것 또한 낯설다. 이는 맹인을 처음 접해보는 주인공의 선입견과, 아내와의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불편함이 뒤섞인 반응이다. 로버트와 아내와의 관계를 차치하고서라도, 맹인을 바라보는 시선. 기실 누구나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담은 도구. 이번 편은 맹인 로버트의–쓰지 않은-검은 안경을 문장에서 꺼냈다.  

  

검은 안경.

선글라스가 아니고 검은 안경이다. 우리는 통상, 투명하지 않은-컬러가 들어간, 주로 까만-렌즈의 안경을 선글라스라 부른다. 굳이 검은 안경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에선 ‘나’의 선입견 속 맹인의 안경을 dark glasses로 표현한다. 영미에선 검은 안경dark glasses과 선글라스sun galsses는 유사한 의미로 쓰이지만, 맥락상 맹인이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기에 검은 안경으로 쓰였다 하겠다.  

맹인에게 검은 안경은 자신의 눈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다. 이와 반대로 선글라스는 밝은 빛으로부터 눈부심을 방지하기 위해 쓰는 도구. 물론 앞선 두 가지 용도를 함께 차용하는 것도 거부감 없다. 우리는 눈을 가리고, 보호하는 용도로 검은 안경을 쓴다. 이젠 일상이 된 검은 안경-선글라스.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을까?

  


안경보다 먼저, 검은 안경 

  

시력 교정용 안경보다 검은 안경을 먼저 사용했다. 동양권에서는 12세기 송나라 때 재판관이 연수정으로 만든 검은 안경을 썼다고 전해진다. 이는 재판관이 죄인을 심문할 때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감추기 위해 쓰였으리라. 당시 재판관의 안경은 연수정에 연기를 쬐어 검게 그을리게 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단순히 표정을 가리기 위한 도구였다. 반면 서양권에서는 1세기 로마 네로 황제가 에메랄드 안경을 쓰고 검투 경기를 봤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밝은 곳에서 경기를 보며 햇빛으로 피로해지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시력을 교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안경이 쓰인 건 13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지방에서 시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피렌체의 공동묘지에서 ‘피렌체에 살았던 안경 발명가 살비노 아마티 여기 잠들다. 신이여 그를 용서하소서Qui diace Salvino d'Armato degl' Armati di Fir., Inventor degl'occhiali. Dio gli perdoni la peccata.’라는 비문을 통해 안경 발명의 기원을 추측해 볼 수 있다. 13세기에 발명된 안경은 14세기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고, 1352년 이탈리아 화가 토모소 다 모데나가 그린 <위고 대주교의 초상화>에서 대주교의 안경 쓴 모습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고 대주교의 초상화, 토모소 다 모데나 Modena, Tommoso da , 1352>

  

일상에서 선글라스라고 부르는, 태양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한 검은 안경의 발전은 미국에서 시작한다. 1929년, 샘 포스터는 애틀랜틱 시티, 뉴저시 해변의 울워스Woolworth 매장에서 포스터 그랜트 Foster Grants라는 이름으로 선글라스를 판매한다. 이는 대량 생산된 최초의 선글라스였고, 패션의 도구로써 처음으로 쓰인 선글라스였다. 이후 1930년대, 존 맥그레디 육군항공단 중위는 광학 기구 업체 바슈롬 사에 비행 조종사를 위한 보안경 제작을 의뢰한다. 기존 비행 조종사의 고글은 고공비행 중 강렬한 빛을 막지 못했고, 이로 인해 조종사들은 심한 어지러움과 구토를 유발했다. 맥그레디의 의뢰로 바슈롬 사는 1936년, 눈부심 방지 특허를 획득하며 렌즈를 개발한다. 이로써 조종사의 안경 에비에이터aviator로 불리는 스타일의 선글라스가 탄생하게 된다.  

태양광선을 막는다는 의미로 레이벤Ray ban으로 불리는 이 선글라스는 패션의 용도로 사용되는 선글라스의 대명사가 된다. 이후 사필로, 룩소티카와 같은 안경 전문 회사들은 명품 브랜드와 협업해 라이선스 브랜드 선글라스를 생산하게 되었고, 1990년대부터 선글라스는 일반 소비자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진, 영화 탑건 속 톰 크루즈의 에비에이터, 1986>

  


로버트가 쓰지 않은 검은 안경 

  

주인공은 아내의 친구, 맹인, 로버트와 게걸스럽게 저녁 식사를 해치운다. 함께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고 컬러 TV를 본다. 맹인인 로버트는 그저 TV를 ‘듣는다’. TV에서는 교회와 중세에 대한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생긴 건지 아시느냐는 겁니다.”
- <대성당>, 문학동네

  

‘나’는 로버트에게 TV 화면 속 대성당을 설명해준다.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지만 도통 설명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한 번도 대성당을, 아니 비슷한 무언가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대성당을 설명한다는 말인가.

  

우린 어떤 대상에 대하여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관념이나 관점을 꽤나 많이 가지고 있다. 주인공 ‘나’ 그 고정적 관념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고, 맹인 로버트는 고정적 관념이 없어 이해할 수 있는 도리가 없다. 이렇듯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속 많은 부분을 서로의 고정적 관념에 의존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맹인이면 으레 쓰는 검은 안경도 마찬가지의 고정적 관념.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 범주 안에 맹인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가 맹인 로버트가 ‘쓰지 않은 검은 안경’으로 발현된 것이다. 이 의미 안에서 검은 안경은 눈을 가리는 용도와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기능을 상실한다. 그저 우리의 고정된 관념 속에서만 로버트의 검은 안경이 존재할 뿐이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 <대성당>, 문학동네

  

로버트와 ‘나’는 종이 위에 대성당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집처럼 생긴 네모를 그리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다. 아치 모양 창문을 그리고, 버팀도리를 그린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로버트의 손가락들은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개념이 서로의 손을 통해 전이된다. ‘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감각은 손을 통해 로버트에게 이동된다. 이 공간 안에서 로버트가 쓰지 않은 검은 안경의 선입견은 삭제된다. ‘나’는 집 안에 있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길이 주인공은 충만한 ‘뭔가’를 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마리화나를 피워 본 적은 없지만, 마리화나 향을 힘껏 빨아내고 띵 한 기분이 드는 마지막 문단이다. 쿨한 첫 문장의 탑노트 향이 가시고 남은 마지막 베이스 노트에는 무언가에 취한 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기묘묘한 향만이 남아 있다. 취한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뭔가 느낄 수 있는 <대성당>을 작가의 표현을 빌어 본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It’s really something. ” 

  

맹인의 검은 안경에 대한 선입견이 어느 정도 지워질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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