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에 대한 다른 시선
"I asked Issey to make me some of his black turtlenecks that I liked."
"나는 이세이 미야케에게 내가 좋아하는 그의 검은 터틀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 스티브 잡스Steve Jobs
블랙 이세이 미야케 터틀넥, 리바이스 501 청바지, 뉴발란스 스니커즈...
바로 스티브 잡스의 시그니처다. 잡스는 옷장에 이세이 미야케 옷을 수백 벌 두고 번갈아 입었다. 그와 이세이 미야케의 인연은 1980년 초반부터 시작이다. 소니를 방문해 직원들의 유니폼에 강한 인상을 받은 잡스는 유니폼을 이세이 미야케가 디자인한 사실을 알게 된다. 애플 직원 유니폼을 그에게 의뢰했지만 직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만다. 하지만 이세이 미야케와 인연은 그때부터 지속되었다.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블랙 터틀넥의 브랜드, 이세이 미야케다.
나는 2009년 이른 봄에 죽었다.
그렇게 믿는다. 아닌가.
어쩌면 겨울이 가기 전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 박범신, 은교 '시인이 마지막 남긴 노트'
우리에게 영화로 더 익숙한 소설 「은교」의 첫 문장이다.
시인 '이적요'가 마지막으로 남긴 노트가 펼쳐지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70대 노인과 10대 여고생의 사랑이라는 소재 자체만으로도 가진 에너지가 관능적이다. 단순한 소재로만 보면 포르노그래피적인 소설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나보코브Vladimir Nabokov의 「롤리타」가 떠오르기도 하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화된 작품을 쉽게, 얕게 보았던 경향을 부인할 순 없을 것 같다. 괜한 지적 허영(?)이랄까.
대중적이면 가벼울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는데 「은교」는 그 생각을 보기 좋게 깨뜨려 놓았다. 단숨에 읽어 들어가게 만든 소설의 내용과 구조는 영화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더욱 느끼게 해주었다.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은밀한 비밀을 열어보고 싶은, 그리고 무언가를 지켜야 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도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세이 미야케와 「은교」라니?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입었던 옷인가 싶지만... 아니다. 조금은 생소할 수 있겠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아니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 어머니 세대들이 좋아하는 '주름'진 옷 이세이 미야케의 주름과 「은교」에서 주인공 '이적요'의 늙음을 상징하는 '주름'과의 접점으로 브랜드와 책의 주제를 엮어보았다.
이세이 미야케는 패션을 예술로 승화시킨 '소재의 건축가'라고 불리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다. 브랜드의 대표적 소재와 모티브는 역시 '주름'이다. 주름진 옷을 통해 테일러링의 한계를 넘어선 그의 옷은 현대성과 실용성이라는 가치를 영리하게 가져가며 사랑받는 브랜드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이 드신 어머니 브랜드로 인지되고 있지만, 브랜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현재 진행형의 힙hip한 브랜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소설「은교」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목차
1. 박범신의 「은교」는 어떤 작품?
2. 이세이 미야케는 어떤 브랜드?
3. '주름'에 대한 다른 시선
은교. 아,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주었던, 나의 등롱 같은 누이여.
- 박범신, 은교 '은교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
관능적이다.
소설에서 스스로에게도 밝히고 있는 내용이지만, 얽혀있는 인물들의 구조와 서사 속에 흐르는 긴장감과 묘사는 관능적이다. 영화에서 뭉툭한 연필 비유가 나오듯 영화가 뭉특한 연필이라면, 소설은 섬세하면서도 깊이감 있는 얇은 붓펜 같은 느낌이다.
박범신 작가(1946 ~ )는 정말 다작多作 작가다.
16년까지 56권의 책을 냈다.(이 숫자는 계속 올라갈 것이다.) 그의 작품을 다 읽는 것도 대단한 독자라 인정받을만할 정도다. 그는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여름의 잔해」로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1978년까지 문예지 중심으로 소외된 계층을 다룬 중단편을 발표, 문제작가로 주목을 받았다.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흰 소가 끄는 수레」,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장편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더러운 책상」, 「나마스테」, 「촐라체」, 「고산자」, 「은교」, 「비즈니스」, 「외등」,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소금」, 「소소한 풍경」, 「주름」등...(이외 더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 다양한 수상 또한 나열하면 줄줄이다. 특징적인걸 보자면 영화화된 작품이 10편이나 되니 꽤나 많은 편이다. 최근에는 차승원 주연의 「고산자」도 개봉했었다. 이번에 다루는 「은교」는 2010년 발표했고, 2012년 정지우 감독의 연출하에 주인공 '이적요' 역에 박해일, 그의 제자 '서지우' 역에 김무열, '한은교' 역에 김고은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소설은 3명의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이적요, 서지우, Q변호사 이렇게 셋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구성이다. 서로 다른 시선으로 같은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 각기 타른 타자로서 서술하고 있다.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송받던 이적요가 죽은 지 일 년이 되었다. 시점은 그가 죽고 난 1년 뒤의 시간부터 그려진다. 절친한 후배 시인이자 변호사인 Q변호사에게 그의 유서와 마지막 기록인 노트가 남겨진다. 그가 죽고 난 1년 뒤 이적요의 유언대로 노트를 공개하려 한다. 하지만 Q변호사는 노트를 읽고 공개를 주저한다. 노트의 내용은 이적요가 17세 여고생인 한은교를 사랑했으며, 애제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서지우를 죽였다는 고백이었다. 또한, 서지우의 저서 「심장」 또한 그가 집필했다는 사실도 적혀있다.
이적요 기념관 설립 및 행사 준비가 한창인 지금, 노트의 공개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 훤하다. 고민을 하던 Q변호사는 한은교를 만나고, 서지우의 일기 파일을 그녀를 통해 건네받는다.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를 통해 그들 사이에 있었던 전말을 알게 된다.
70대 나이의 이적요는 자신의 늙음과 대비되는 은교의 젊음을 보며 관능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녀를 통해 자신의 '청춘'을 되돌아보게 되고, 젊은과 욕망에 대한 불길이 지펴진다. 제자 서지우는 이적요가 은교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은교에 대한 집착이 커져간다.
문제없는 사제지간이었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는 은교를 중심으로 긴장감이 고조되고, 열등감과 질투, 모욕이 엉키며 관계가 위태롭게 유지된다. 서지우가 이적요의 작품을 훔쳐 단편소설을 게재하고 갈등은 극에 달한다. 서지우는 자동차 사고로 죽고, 이적요는 스스로 고통을 주며 죽음을 끌어당긴다.
고전이 아니기에 내용을 더 넣으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를 대략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영화와 소설은 중심 줄기만 같지 디테일은 꽤 다르다. 혹자는 영화가 더 낫다, 소설이 더 낫다 그러지만 미묘한 차이는 두 가지 맛을 다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주인공 이적요가 느끼는 열등감과 질투는 '젊음'에 대한 부분이다. 70대 주인공이 10대 소녀를 가슴에 품고 있고 그것의 나래를 펼친다는 점이 짐짓 불편함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젊음'과 '나이' 의 한계에서 오는 긴장감과 욕망을 다루고자 한다.
이는 '주름'으로 표현된다.
세월 따라 근육이 많이 빠져 달아난 그녀의 허벅지는 주름살이 잘 잡히는 옷감처럼 자유자재로 구겨진다.
(중략) 하지만 근사하다. 젊은 육체와는 다른 겸손함, 아늑함, 푸근함이 있어 좋다.
-박범신, 은교 '꿈, 호텔, 캘리포니아'
이적요의 꿈에서 이적요는 은교와 함께 젊어지고 늙어진다.(표현이 이상해 보일 수 있으나 그의 상상 속이니.)
젊음을 갈망하지만 이적요가 사랑하는 은교가 늙어 생긴 '주름'마저 사랑스럽다. 여기서 '주름'은 단지 물리적 시간이 흘러 축적된 흔적이지, 사랑의 감정을 방해하거나 밀어내지는 못하는 존재다. 그런 의미로 이적요의 '주름' 또한 은교에 대한 감정을 밀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명제에 건너편에 있는 듯하다. '마음은 몸과 무관하게 움직일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은 몸을 기반으로 인간 인식의 기틀을 체계화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이적요의 늙은 몸과 무관하게, 마음에서 피어난 감정으로 은교와 감정을 공유한다. 이런 판타지는 거짓이지만 아름답다.
철학 건너편 문학의 아름다움이랄까.
"繊維は21世紀のテーマだ。
デザインとは、裸の身体を起点とし、そこに付け加えていくものだが、
最終的には裸という原点に戻ってくるものだ。"
"섬유는 21 세기의 테마다.
디자인과 벌거벗은 몸을 기점으로 하고 거기에 덧붙여 나가는 것이지만,
결국은 알몸이라는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다."
- 이세이 미야케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1938 ~ )는 브랜드 이세이 미야케를 만들었다.
패션에 문외한이던 시절, 이세이 미야케는 여성들만의 브랜드구나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주름진 옷, 향수, 가방 등만을 봐왔던 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세이 미야케는 남자였다.(나만 놀랐나?) 소재의 구성과 옷의 구성감만을 봤을 때, 느껴지는 섬세함과 감각으로 인해 '여성 디자이너구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일본적인 브랜드다.
20세기 후반 '주름'을 모티브로 삼고 '세계 패션을 주름잡은' 브랜드다. '어떤 브랜드야?'라고 의구심을 갖고 있겠지만, 주름 잡힌 플리츠 원단의 입체적 디자인을 보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세이 미야케는 1938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마예술대학Tama Art University 도안과를 졸업해 도안 디자이너가 되려 했으나, 2학년 때 문화복장학원 콘테스트 입상을 계기로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가진다. 파리의상조합학교에서 공부 후, 1966년 기 라로쉬Guy Laroche를 거쳐 1968년 지방시Givenchy 보조 디자이너로 일했다.
1970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텍스타일 디자이너 마키코 미나가와Makiko Minagawa와 함께 미야케 디자인 스튜디오Miyake Design Studio를 설립하면서 새로운 소재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을 시작한다. 1971년에 뉴욕에서 첫 번째 컬렉션을 발표, 뉴욕 블루밍 데일 백화점Bloomingdale에 본인 이름의 매장을 연다.
1973년 파리로 진출해 첫 이세이 미야케 F/W 컬렉션을 발표한다. 이후 일본에서 가장 큰 관객 동원력을 지닌 다자이너로 인정받으며 '그가 표현한 의상은 움직이는 조각이다.'란 평을 받는다. 그는 천布과 육체와의 교감이라는 관점에서 복식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독자적 세계를 구축한다.
디스플레이나 패키징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전통적인 일본식 디자인과 아프리카 타입의 직물을 결합하면서 안티 패션Anti Fashion 콘셉트를 통해 성공을 거둔다. 이세이 미야케는 직물과 볼륨에 대한 독창적, 감각적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몸을 느슨하게 감싸는 헐렁하고 커트가 적은 직선적인 옷감을 즐겨 사용한다.
1974년 일본 패션 편집인 클럽상, 1976/1984년 마이니치신문 패션상, 1979년 뉴욕 프레트 패션 디자인학교 상, 1984년 니만 마커스상 2부문과 미국 패션디자인협회 CFDA 상을 수상한다.
이세이 미야케 산하 총 11개의 브랜드가 전개 중이다. 이세이 미야케, 이세이 미야케 맨, 플리츠 플리즈, 옴므 플리스, 하트, 미 이세이 미야케, 바오바오, 132 5. 이세이 미야케, 인-엘 이세이 미야케, 이세이 미야케 퍼퓸, 이세이 미야케 워치. 이렇게 11개 라인업을 가진 거대 패션 브랜드다.
이세이 미야케는 2차원적이고 평평한 직물을 입었을 때 3차원적인 조각적 형태로 변형된다는 점에 관심을 가졌다. 인체와 옷감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두어 인체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의복을 이해하고 옷을 제작한다. 그리하여 그의 옷은 얼핏 보기에는 미니멀리즘의 회화 작품 같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보이겠지만, 인체에 입혀지면 움직임에 따라 꺾이고 부풀면서 다양한 3차원적 형태미와 공간미를 갖는다.
여기서 옷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보자면 *주름(플리츠pleats)이다.
히스토리만 보고는 옷의 느낌을 잘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옷들을 보면 생각했던 이미지는 더욱 뚜렷해진다.
*플리츠 : <수공> 스커트 등에 아코디언 주름상자 모양으로 잘게 모를 내어 잡는 주름.
주름 잡힌 원단은 가볍다. 여행용 트렁크에 포개 넣어도 구겨지지 않는다. 주름 잡힌 입체적 재단 때문에 움직임이 자유로워 활동성이 좋다. 이세이 미야케 라인 중 이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플리츠 플리즈Pleats Please다. 다른 브랜드에서도 비슷한 소재의 옷은 내놓지만 가장 오랜 역사와 기술력을 가진 브랜드다.
“나는 옷의 절반만 만든다. 사람들이 내 옷을 입고 움직일 때야 비로소 옷이 완성된다”라고 이세이 미야케는 말했다. 이와 같이 옷을 바라보는 그의 철학은 옷뿐만 아니라 소품으로도 이어진다.
주름에서 더 나아가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바오바오Baobao가 탄생한다.
딱딱한 플라스틱 소재에 구조감을 넣어 주름의 감성을 넣었다. 익숙한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모양과 형태는 눈에 익었을 것이다. 백화점에 가면 들고 다니는 사람 한두 명은 꼭 보는 바오바오다. 이 가방은 움직임에 따라 작은 삼각형 유닛의 모양이 자유자재로 변형된다. 가볍고 부드러운 데다 안에 넣은 물건에 따라 형태를 바꿀 수 있어 ‘유연하고 혁신적인’ 이세이 미야케 브랜드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주름[명사]
1. 피부가 쇠하여 생긴 잔줄.
2. 옷의 가닥을 접어서 줄이 지게 한 것. (비슷한 말) 벽적.
3. 종이나 옷감 따위의 구김살.
- 국어사전, 국립국어원
「은교」에서 주름의 의미는 '피부가 쇠하여 생긴 잔줄'이다.
이적요는 주름진 70대 노인이다. 그런 그가 10대 소녀인 은교를 사랑한다. 여기서 욕망하는 은교는 17세 소녀 그 자체가 아닌 '은교로 대표되는 영원한 젊음'이다. 실은 그녀 또한 보통의 10대 소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적요가 본 경이로운 아름다움은 그저 그녀가 가진 젊음의 광채였던 것이다. 그러한 젊음의 반대 편에 이적요의 늙음을 상징하는 '주름' 이 있었고, 이러한 닿을 수 없는 욕망이 소설을 이끌어 간다.
소설에서의 '주름'이 젊음을 갈망하는데 방해가 되는 흔적이었다면, 이세이 미야케의 '주름'은 자유의 도구이다. 몸에 달라붙는 옷은 몸의 동작을 제한하며 신체를 구속한다. 반대로 주름을 지닌 옷은 몸에 공간을 부여하며 신체를 옷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이세이 미야케는 몸에 자유를 부여한다.
어머니들이 자주 입는 주름진 옷의 의미는 본인이 가진 주름(세월, 시간)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 의사표현이자, 굽히지 않는 의지다. 이세이 미야케를 어른들의 옷으로만 규정짓는 것은 무리겠지만, 주름진 옷이 주요 테마인 이 브랜드를 사랑하는 분들의 구매 행태를 살펴보면 옷을 입는 행위는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 박범신, 은교 '범죄'
소설 구조에서도 '주름'은 목격된다.
이적요의 노트, 서지우의 일기, Q변호사의 각기 다른 시점과 시간은 소설 구조의 '주름'을 만들어 내고 이야기의 몰입감과 공간감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세이 미야케의 11개 브랜드 라인업은 라인과 라인 사이에 '주름'을 만들어내고 여성 의류 고객뿐만 아니라 남성 고객, 가방과 시계류의 소품을 찾는 고객, 향기를 찾는 고객들의 욕구를 채워준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Gilles Deleuze 아장스망agencement과 맞닿아있는 브랜드와 책이다. 다중체라고도 불리는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다중체란 '차이 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란 뜻이다.
옷과 주름의 본성을 가로질러 새로운 옷의 형태를 탄생시킨 이세이 미야케와 다른 시점과 공간을 엮어 소설로 구성한 박범신의 「은교」는 이를 충분히 구현해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주름'을 통해 책과 브랜드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우리 몸의 부분들의 주름이 있어 움직임이 자유롭듯, 옷도 마찬가지였다. 주름지고 구겨진 옷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며 옷장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