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어려워지는 일들
사춘기를 강원도 속초에서 보냈고 스무 살 때부터는 학교 때문에 서울 누나 집에서 생활했다. 그렇다 보니 중고등학교 친구는 다 강원도 사람이다. 그중에 대학도 강원도권으로 진학했던 친구 하나가 있는데 이 친구가 방학 때 서울로 놀러 왔다. 당시 친구는 서울에 제대로 혼자 와보는 게 처음이었다. 참고로 강원도 영동지방엔 지금도 지하철이 없다. (나로선 부산, 대구와 같은 광역시에 지하철이 있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그나마 서울 생활을 조금 한 내게 전화를 했다. “야, 나훔아 나 지하철 처음 타본다. 근데 자리에 앉고 나서 어딜 봐야 되냐. 그냥 정면에 사람 봐야 되나?” 평소 진지한 말투로 농담을 잘하는 친구이기도 했지만 그날의 말투는 조금 진심이 묻어 나왔다. “크크크 그냥 아무 데나 보면 되지 무슨... 하하하” 그렇게 깔깔거리고 전화를 끊었다. 엉뚱한 친구의 통화에 한참을 혼자 실실거렸다. 그리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도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가만히 친구의 이야기를 곱씹어봤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하철에 앉으면 눈을 어디에 뒀더라?’ 독서에도 전혀 취미가 없던 때였고, 수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스마트폰도 거의 보급되지 않던 시기..막상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내가 지하철에 앉았을 때 눈을 어디에 두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눈이 마주칠 경우에 상냥하게 웃어주는 문화의 나라가 아니다. 가만히 누굴 응시하다가는 ‘뭘 쳐다(꼬라)봐’하고 눈총 받기 십상이다. 그렇게 이리저리 눈을 돌리다가 다른 사람들은 어디를 보나 관찰했다. 눈을 감고 있는 학생, 아저씨도 있고 광고판 혹은 창밖을 응시하는 사람들, 정면에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렇게 시선을 여기저기 굴려보다가 사람의 발끝이나 광고판을 바라보는 게 가장 편안하겠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광고물에 큰돈을 쓰나 보다 싶었다.
지금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남녀노소 국적 불문하고 (나를 포함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대의 사람이 환생해서 지금 이 광경을 본다면, “왜들 그리 모두 낙담해있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라 여겨진다. 그러고 보면 지금 막 서울에 상경한 지방 친구들은 눈을 어디에 둘지 그때만큼은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군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