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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Oct 15. 2019

바쁜 나, 바쁜 세상

빠른 시간

‘너무 오랜만에 글을 쓴다’라고 글을 쓰려다가 이젠 이런 자조적이고 의미 없는 말은 그만 써야겠다고 다짐한다.(그러면서 씀.) 이제는… ‘한 달에 한 번만이라도 네 생각을 정리할 수 있으면 그래 그거면 됐다 이놈아’라고 포기한 아들내미한테 말하듯 나 자신에게 말해 본다. 보통 이러다가 못난 아들내미가 경사스러운 일들을 터트리기도 하지 않은가...


 작년부터 독서나 글쓰기에 취미를 갖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느낀 것은 바쁜 일들로 정신이 팔리고 혼란스러울 때 읽기나 쓰기만한 처방전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공허한 마음을 어찌할지 몰라 발을 동동거리고 산책을 하거나 여행을 떠났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읽기, 쓰기를 통해서 그런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느끼게 됐다. 한동안 잦은 외근으로 먼지가 쌓인 방안에 돌아와 정신 차려보니 새삼 여기서 도저히 편하게 잠을 잘 수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청소할 마음을 먹는 것과 같은 감정이 아닌가 싶다.


 많은 일이 있었다. 얼마 전, 집 주변 산책을 하다가 편안하고 아담한 카페 하나를 발견했고 카페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 촬영 작가님을 소개받았고, 감사하게도 강릉의 다양한 전시 공간, 작가, 관계자 분들을 또 건너 건너 알게 됐다. 그리고 지난달 끝난 개인전에 이어 이번 달에는 강릉에서 그룹전 하나와 개인전 하나를 진행하게 됐다. 생각보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안도의 마음과, 동시에 이렇게 급작스럽게 닥친 많은 관계나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개인대 개인으로서의 관계 유지도 집단적인 관계 속에서 사회적 유대감을 유지하는 것도 늘 내겐 어려운 일이다.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오해나 틀어짐이 생길까 두려워 어색한 표정의 사회적 동물이 된 내 모습을 가끔 발견하고는 속으로 웃는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대해 투정 부리기에는 과분한 기회들이 실로 많이 주어졌다. 얼마 전에는 강원도에서 지원하는 지역 크리에이터로 선정이 되어서 적지 않은 금액의 예산을 지원받아 내 계획을 펼칠 수 있게 됐다. 늘 지역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자체의 응원과 지원도 받게 된 것이다. 이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이어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감사하다. 이젠 책상 앞에 앉아 잡념인지 영감인지 알 수 없는 머릿속 더미들을 천천히 풀어내고 분류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 내 주변 여기저기에는 공과금, 과태료(…), 자동차 수리비, 보험 등과 같은 생활 속 자잘한 책임감과 골칫거리들이 산재해있다. 편리를 위해 이것저것 조금씩 늘리다 보니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날 확률도 그만큼 늘어나 이제는 책임이나 해야 할 의무가 되어 내 걸음에 불편을 주고 있다. 이렇게 쓰다 보니, 누군가의 눈엔 비웃음이나 들을 툴툴거림처럼 느껴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점점 투덜대는 일들이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 싶어지기도 하다. 이런 패턴으로 80살쯤 되면... 아 끔찍하다. 


 어제는 커다란 이슈가 있었다. 조국(전)장관이 법무부장관직을 사퇴했고 25세의 설리가 유명을 달리했다. 세상은 각자의 의견으로 가득 차 떠들썩하다. 이런 혼란 속에서 난 결론은 최대한 적게 내리고, 조용히 다양한 상황이나 의견을 받아들이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잠시 시간이 날 땐 다양한 여론들을 살펴본다. (최근엔 인터넷 기사를 일절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어젯밤에는 설리의 극단적 선택에 대한 다양한 대중들의 의견을 접했고, 조국 장관과 관련된 다양한 의견, 정경심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시구절을 기사로 접했다. 전자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고, 후자는 복잡한 정치적 사안이기에 내 의견을 피력하진 않겠지만, 어제 우연히 접한 박노해 선생님의 시가 내겐 특히 인상적으로 읽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같은 날 유명을 달리한 설리의 삶이 떠올랐다. 그렇게 서둘러야만 했을까... 시간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멀리서 봤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느낄수 없을 감정이기에, 이런 말들 조차도 폭력이 될까 조심스럽지만... 

 시를 읽자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졌다. 삶의 매 순간은 영원할 것처럼 우리에게 치명적이지만 결국 아주 일시적이며, 지구의 모습이 그러하듯 시간은 크게 회전을 하며 냉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 속에 우리는 감정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미물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에 멍해졌다.

 

 오랜만에 집 주변을 둘러보니, 뒷산 밤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밤송이가 전부 떨어졌고, 은행나무 꼭대기가 노랗게 변해 축 쳐져있다. 해는 짧아져 금방 어둠이 찾아온다. 모두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동그란 길로 가다> - 박노해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결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쁨도 짧다.

지옥의 고통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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