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hum Jan 11. 2019

3. 인현동 인쇄골목 (2)

왁자지껄 낯선 인현동 인쇄골목

일은 사장님과 나 단둘이서 하게 된다. 중요 업무는 사장님이, 몸 쓰는 일은 나의 몫이다. 나에게 인수인계를 해줄 나보다 두 살 많은 남자가 있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였다. 그날은 12월 30일. 다음 해인 1월 2일부터는 전부 나 혼자서 업무를 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은 국내 기술로 인쇄된 명함이나 엽서와 같은 작은 사이즈의 소량 인쇄물들을 주문하고 또 검수 및 포장하여 일본으로 수출하는 업무였다. 복잡한 충무로 인쇄골목에 있는 여러 거래처에서 주문한 인쇄물들을 사무실로 전부 찾아와 포장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일이었는데, 업무 자체는 간단한 일이었다. 내게 인수인계를 하던 남자는 담배를 한 대 태우자면서 밖으로 나와 내게 말을 건넸다.

“회사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사장님이 좀 성가셔서 그렇지...”
“그래요?”

“네, 사무실에 있으면 제가 가만히 있는 걸 못 참고 이것저것 시키려고 하거든요.
외근 중일 땐... 이것 참견 저것 참견... 전화 통화할 땐 일본어로 쏼라쏼라 말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고.... 아! 제가 이런 말 했다고 당장 내일부터 출근 안 하시거나 그러면 안 돼요!.. 아셨죠?”

“네”

아... 피시방 네 군데에서 떨어진 사람에게 먼저 손을 건넨 회사가 좋은 회사일 거라는 기대는 정말 큰 욕심인 것인가.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지만 당장 내가 뭘 가릴 형편은 아니었다. 그 남자는 사무업무들과 충무로 구석구석에 있는 거래처들과 거기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알려줬다. 사업 초기라 그런지 업무량은 정말 많지 않았다.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난 뒤에 또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이제 딱히 할 건 없어요.

이따 오후에 물건들 포장해서 보내기만 하면 돼요.

저는 이 시간에 피시방을 가기도 해요.
사장님께 연락 오면 그냥 외근 중이라고 하면 되죠.

아직 영화는 본 적이 없는데 정말 일을 빨리 마치면 그것도 도전해볼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 ? ”



 도대체 뭘까 이 회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편한 회사라면 편한 회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전에 어딘가 비상식적으로 흘러가는 이 회사의 분위기에서 불안감을 느꼈다.


 그렇게 새해에 나는 의구심을 가진채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흘러갈수록 그 불안한 마음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뀌어갔다.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김 사장님은 그 누구보다도 수평적인 마인드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조금 투박하긴 해도 거기에는 지성과 유쾌함이 있었다. 청년들이 갖고 있는 진로의 불안함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일을 빨리 마치면 집에 어서 돌아가서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처음엔 그런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됐다.) 내가 진짜 집에 가도 되나?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고 있을 때면 “할 일을 다 했으면 집에 가는 거지 무슨 문제 있어? 빨리 가”라고 말하셨다. 또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있는 내게, 인쇄회사는 내 그림을 인쇄해서 실물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기회의 장이었다. 실제로 그다음 해에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 제안이 와서 모든 인쇄비용을 회사 돈으로 지원해주셨다. 문제는 사장님 쪽이 아니라 그 이전 직원에게 있었던 것이다. 막차가 끊기기 전 밤늦게까지 회사에서 전시할 작품을 준비했던 일들, 전 날 작품을 주문해놓고 다음 날 아침 인쇄물을 찾으러 가는 출근길 아침은 늘 두근거렸다. 급여는 많지 않았지만 피시방 쪽보다는 괜찮았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 사무실이라서 인쇄물들을 들고 오르락내리락 몸은 힘들었지만 혼자 하는 일이라 정신만은 자유로워 재밌는 생각도 많이 떠올랐다. 퇴근 후 집에서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2. 인현동 인쇄골목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