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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Feb 15. 2020

8. 자유와 불안 (2)

'우울'이라는 감기의 시작

 얼마 후 회사엔 새로운 직원이 들어왔다. 6년간 혼자 했던 업무를 알려주기 위해선 짧지 않은 인수인계 기간이 필요했다. 그 시기 난 세 달 뒤 베를린으로 떠나는 편도 티켓을 끊었다. 독일대사관에서 1년짜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기는 했지만, 금방 돌아올지 1년을 채울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부정적 마음으로 꽉 찼던 그 시기의 난 그림도 그만두고 아예 한국을 떠나 다른 기술을 배워 새 삶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과정 또한 가시밭길이겠지만 그것을 상쇄할 만큼 지금의 삶을 부정하고 싶었다.

 사실 처음엔 내가 하는 그림 일을 잘 살려서 국내 괜찮은 회사에 취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전문 분야에 대한 학력도, 인쇄회사에서의 경력을 빼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었기에 적당한 취업자리도 찾을 수 없었다. 신입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많고 경력자라 하기엔 또 애매했다. 매일 스스로 기획을하고 그림작업을 일로 해왔던 나는 이전에 있었던 한 사례로 이런 내 직업적 특성 알고 있었다.

 예전, 회사를 다니며 그림작업을 병행하기 시작했던 해에 어떤 이미지 회사에서 협업 제안이 온 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그 제안에 큰 희망을 품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서, 회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담당자는 회의 결과 내가 이미지 회사에 부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했다. 그 이유로는 첫째, 미대를 나오지 않은 작가가 우리가 원하는 그림을 정확하게 묘사해줄 수 있는가-하는 의문점이었고 작가가 갖고 있는 작가주의적 성향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처음엔 그 말에 당황했지만 얼마 후에는 납득이 갔다. 난 아무 의미 없는 그림을 그저 똑같이 묘사하는 방식의 그림을 매번 그릴 자신이 없었고, 그건 나로서도 원하는 창작의 방향이 아니었다. 그전까지는 어떤 방식이 되었든지 '그림으로 먹고살자'는 막연한 목적으로 살았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분야가 같더라도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가 상이한 것이다. 어쩌면 분야라는 것은 아주 사소한 카테고리 중 하나일 뿐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결이랄까 방식은 조금의 연관도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든다. 어쨌든 그 일은 내게 큰 깨달음을 준 사례가 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2017년. 그런 나의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이제 어떤 기업에서도 필요로 하지 않는 부품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고심 끝에 한 맥주회사 디자인팀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불합격 통보는커녕 아무 답장도 받지 못했다. 가장 웃기고 어이없는 사실은 내가 그 이력서를 넣으면서 베를린행 티켓을 2주 뒤로 미뤘다는 점이다. 회사에 합격하면 베를린에 가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얼마나 대책 없고 계획의 내구성이랄까 지조가 없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잘도 글로 떠들고 있다.) 어쨌든 출국일은 점점 다가왔고 합격일이 되어도 내 전화는 조용했다.

 이력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7,8년 전 작성했던 내 오래된 이력서 양식을 발견했다. 그 문서를 갱신하려고 하는데 딱히 빈칸에 기업이 좋아할 만한 이력을 더 채워 넣을 수가 없었다. 그 긴 시간동안 난 뭘 했던거지? 서글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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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졌고, 난 며칠간 꼼짝없이 방 안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창문 사이로 아침해가 떴다가 조금씩 저물어가는 모습을 하루 종일 누워서 바라보았다. 입맛도 사라져 버려서 살이 급속도로 빠졌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은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래도 어쨌거나 인수인계를 위해 회사는 나가야만 했다. 그나마 사장님이 배려를 해주셔서 일주일에 몇 번 정도만 회사에 나갔다. 


 퇴근 후 저녁, 수유역 사거리 맥도날드 2층 자리에 앉아 거리에 수많은 인파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바삐 어디로 가는 걸까? 모두 어떤 의미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거지? 삶이라는 것은 과연 축복일까? 마음 속으로 답도 없는 질문들을 거리 위 사람들에게 던졌다.


 나는 그 시기 여러 소설이나 에세이를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살려는 의지에 불을 지펴보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그때 듣던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습관처럼 좋은 구절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는 밑줄을 쳤다. 하지만 좋은 구절을 인지하는 것과 진정 가슴 안으로 들이는 일은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한쪽 귀를 통해 들어온 말은 흡수되지 못하고 반대편으로 새어나가 버렸다. 가족, 친구들의 따뜻한 말들은 물론 책 속의 어떤 성인군자의 진리 앞에서도 나는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어쨌든 상황은 적잖이 심각했다.


 무기력한 나를 돌봐주었던 사랑하는 내 사람들. 돌이켜 봐도 그 시기는 모두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죄스러운 나날이었다. 그런 나를 베를린으로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프다. 누나와 엄마는 독일에 가서 계획이 있느냐 물었다. 당연히 없었다. 지금처럼 마음이 병든 상태에서 주변의 가족들마저 없는 타지 생활을 어떻게 버틸 수 있겠냐고 걱정했다. 얼마나 있다가 올 생각이냐는 질문에도 처음엔 기약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가족들은 공항에 배웅을 나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런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되는 슬픔의 순간은 도저히 나로서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얼마 뒤에는 '세 달 정도만 유럽을 여행하고서 돌아오겠다'는 말로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당장은 여러모로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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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작품은 의지가 바닥이었을 때 겨우겨우 힘을 쥐어 짜 그렸던 그림들이다. 

특히 '고등어'는 지금도 내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그림이 되었다.


빚 (2017) : 돈때문에 사는 사람들
해방(2017) : 억압된 자유보다는 방종을 택하리


고등어(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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