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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Feb 26. 2020

11. 베를린, 출국임박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내 인생

퇴사 후 준비


 2017년 겨울. 난 회사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퇴사했다.
 

 18년 새해가 밝았다. 베를린으로 향하는 출국일은 점점 가까워졌다. 남아있는 시간은 가족 친구들을 만나 작별인사를 하는데 사용했다. 가족들에게는 '3개월 정도 유럽을 여행하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모호한 말로, 친한 친구들에게는 '새로운 기술이나 직업을 배워 정착을 하든 뭘 하든... 살아남고 싶다.'는 말을 했다. 굳이 안심을 시키거나 괜찮은 척 애쓸 필요가 없는 친구들 앞에서 한 말들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심지어 누구를 언제 만나냐에 따라 내 계획에 대한 답변은 매번 바뀌었다. 나조차 내 삶이 어느 방향으로 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백프로 내가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이 부담스럽고 피곤한 인생의 운전대를 맘 같아선 누구한테든 확 떠넘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꼬여버린 내 인생, 언제 끝날까? (2018) / 베를린에 도착하고 그렸던 그림



 최대한 솔직하게 글로 옮기기로 마음먹었으니 조금 불편하더라도 당시 갈 데까지 간 나의 피폐한 정신상태를 적어본다.


 인생의 계획은커녕 살아갈 의욕마저 잃은 나는 '여기서 가족들을 속상하게 하면서 죽어가느니 지구 반대편이 어떻게 생겼는지나 보고 아무도 모르게 죽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실제로 누나의 권유로 심리 상담, 약처방까지 받고 있던 나는 '죽고 싶다'는 감정보단 '왜 계속 더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만약에 지구 반대편에 가서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냥 베를린 강가 어딘가에 몸을 던져버리자-는 극단적 생각으로까지 상상력은 치닫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근데 베를린에 그 정도로 깊은 강은 있나?', '독일의 기술력이 너무 좋아서 금방 나를 건져 올리지 않을까?'하고 엉뚱한 생각을 했던 당시를 떠올려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정말 진지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국일


 이제야 고백하는 것이지만 출국일이 눈앞으로 다가온 며칠간은 내 안에 조금씩 현실자각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대체 독일에서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영어도 독일어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이렇게 짐을 바리바리 싸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갑자기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뭐에 홀린 듯 지나온 몇 달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얼빠진 상태로 나 스스로를 부정하고 우울감에 허덕이며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나. 그 '나'란 놈이 베를린 편도 티켓까지 무작정 끊어놓고 현재의 나를 떠밀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날 기다리는 것은 미리 예약해둔 베를린 외곽에 자리한 숙소 주인아주머니, 그리고 한인 사이트에서 알게 된 J형뿐이었다. 불안감이 한창 깊어지던 어느 날, J형은 내게 보이스톡으로 연락을 했다.


"마음이 힘들 때가 있죠? 너무 겁먹지 마세요.

막상 와보면 고민했던 것들이 별 고민거리가 아니었구나 생각하게 될 거예요.

반대로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고민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요.

생각이 너무 많아질 땐 독일어 단어라도 외우면서 공부를 조금씩 해보세요.

전 그런 게 도움이 됐거든요. 곧 만나요! "


 큰 위로가 됐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얼굴도 모르는 J형. 이 따뜻한 사람이 당시의 내겐 베를린에 갈 유일한 이유이자 동시에 의지할 수 있는 작은 버팀목이 되었다.


 아침이 밝았다. 급하게 사용할 돈도 유로로 환전했고 해외용 체크카드, 옷, 노트북 등.. 생필품들을 챙겼다. 한 곳에 모아놓고 보니 커다란 캐리어 하나와 백팩 하나가 되었다. 체류기간을 명확히 정하진 않았지만 짐이 많아서 좋을건 없으니 대략 3개월 정도의 체류 기간을 기준으로 짐을 쌌다. 옷도 몇 벌 챙기지 않았다.


캐리어 하나, 백팩 하나


 10년 가까이 살던 서울의 반지하 집은 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건 정말 대책 없는 짓이었다. 핑계를 대자면 집엔 온갖 짐들이 있었는데 전부 베를린에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어디 맡겨놓을 만한 곳도 없었다. 때문에 방을 그대로 방치한 채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서울치곤 월세가 비교적 저렴했던 것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금액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모두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대단하다'고 혀를 찼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 밖을 나서기 전, 현관문 앞에 서서 천천히 집 안을 돌아보았다.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만 있었던 침대, 사놓고 한동안 방치해서 죽어가는 몇 개의 화분들, 몇 년 간 내 그림 작업을 위해 고군분투해주었던 27인치 아이맥, 반지하치곤 햇빛이 제법 잘 들어왔던 화장실... 그 모든 것들이 나와 힘든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들처럼 느껴졌다. 슬픈 감정이 일었다. 그들을 돌보지 않고 무책임하게 나만 달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목요일 오전.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익숙한 동네를 바라보았다. 직장을 향하는 사람들과 교복을 입고 어딘가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았다. 나는 그 사이를 배회하는 더 어리숙한 어떤 존재처럼 느껴졌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지금의 내 한심한 모습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의 첫 유럽여행은 이런 기분으로 시작됐다.


 오후 1시 20분.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는 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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