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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Feb 29. 2020

12. 드디어 베를린 도착

여행 / 서른 살 아저씨가 다시 아이가 되는 기적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탑승수속에서부터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로밍 때문에 통신사 직원과 실랑이를 하다가 그만 탑승수속도 늦어진 것이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공항의 직원은 내가 베를린으로 들어가는 편도 티켓밖에 없다며 체크인을 해줄 수가 없다고 했다. 독일에 들어갔으면 나가는 티켓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남은 시간은 10분 남짓. 이대로 비행기를 떠나보낼 순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폰으로 베를린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어버렸다.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기내에 탑승하자마자 서둘러 전화를 걸어 간신히 티켓을 취소하는데 성공했지만 외국도 아닌 자국에서부터 일이 이렇게 꼬인다는 것은 정말 불안하고 불쾌한 일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전 날 잠을 설친 탓에 장시간 비행에도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인천과 베를린은 직항 비행기가 없어서 모스크바에서 환승을 했다. 그곳에서 3시간 정도 대기를 했는데 그때부터 내가 먼 곳을 떠나왔다는 사실이 점차 실감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러시아어, 나와는 전혀 다른 다양한 외모, 인종의 사람들… 공항 무선인터넷은 뭐 때문인지 먹통이었는데 이제 진짜 혼자가 되었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희열이 동시에 차올랐다. 목이 말라 자판기 앞에 섰는데 화폐 단위가 루블(RUB)이라 우물쭈물 하다가 그냥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집을 나선지 약 18시간째. 마침내 나는 베를린 쇠네펠트(Schönefeld)공항에 도착했다. 그때의 기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도착시간이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였던 것도 있겠지만 공항답지 않게 건물 내부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아니 그보다 일단 사람들이 가득 들어찰 만한 크기의 공항이 아니었다. 내 상상과는 딴판이었다. '이게 정녕 독일의 수도, 베를린 공항이란 말인가' 생각했다. 그 이후, 베를린 중심에 위치한 테겔(Tegel)공항에 간 적도 있었지만 쇠네펠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 뿐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여행 장소에 대한 거창한 환상 같은 것은 없는 편이나 왠지 모르게 어깨가 쩍 벌어진 늠름한 자태의 베를린 공항을 상상해본 일은 몇 번 있었다. 그 상상의 이미지는 내게 제법 선명한 편이라 지금도 노트를 펼치면 얼추 그릴 수 있을 정도이다. 어쨌든 현실은 조금도 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첫날부터 알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스마트폰을 꼭 쥐고 조심스럽게 걸어나갔다. 까다로운 독일인들의 입국심사에 대한 일화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긴장을 했다. 특히 당시 IS테러, 난민 관련 이슈가 많이 터져서 외국인 수용에 적극적이던 독일정부도 반대여론에 압력을 조금씩 받던 시기였다. 때문에 난 여러 돌발 질문에 대한 답변도 미리 적어놓고 나름 만발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막상 내 앞의 직원은 좀 귀찮다는듯한 태도로 너무도 쉽게 날 통과시켰다. 허무하긴 했지만 출국했을 때와 비교해 모든 게 순조롭다는 사실에 기뻤다. 



  공항 밖으로 나와 찬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주변은 고요했다. 공항에는 고맙게도 집주인 아주머니께서 마중을 나와주셨다. 공항과 숙소가 워낙 도시 외곽에 자리한지라 밤 시간엔 교통편이 없었다. 흰머리가 많이 난 아주머니였지만 노인이라고 하기엔 매우 정정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경차를 타고 한적한 밤길을 지나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내가 지낼 곳은 여러 유학생들이 생활하는 셰어하우스였다. 집주인분에게 집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받고 방으로 들어와 가방을 풀었다. 피로가 쌓여 패딩을 책상에 휙 하고 벗어던진 뒤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집은 이층 집이었고 내 방은 가장 위층이었다. 유럽 주택의 특성상 내 방 한쪽의 천장은 지붕 때문에 대각선으로 깎여있었다. 


 가만히 누워 오늘의 일을 돌이켜봤다. 눈만 휘둥그레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세상 물정 모르는 애처럼 엉거주춤하던 내 모습이 순간 남일처럼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침대, 책걸상,옷장이 하나씩 있었다. 차분한 미색 조명의 아담한 방이었다. '내가 정말 베를린에 오기는 한 건가' 얼떨떨했다. 자정을 넘긴 깊은 밤. 방 안은 고요했다. 폰을 열어 보니 한국의 가족, 친구들은 이제 막 출근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이상해진 서른 살 언저리의 아저씨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구는 정말 둥글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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