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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Mar 02. 2020

13. 고마운 집주인 아주머니

나이, 살아온 환경을 넘어서

 아침이 밝았다. 1층으로 내려가 집주인 아주머니께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초콜릿, 버터를 겹쳐 바른 크래커를 내주었다. 맛이 참 좋았다. 그리고 우린 식탁에 앉아 어제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머니는 약 50년 전 파독 간호사 활동으로 독일에 넘어오신 한인분이다. 그 이후로 독일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여 이곳에서 가정을 꾸렸다.



 나는 베를린에 오기 전까지의 내 상황을 간추려 아주머니께 전했다. 첫날부터 너무 급진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많은 유학생들이 사는 집을 관리하는 집주인 입장에서 세입자의 입주동기나 거주계획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다른 학생들과 비교할 때 나는 뾰족한 동기나 거주기간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었고 이야기는 의도치 않게 조금 길어지게 됐다. 아주머니는 한참을 끄덕이며 내 이야기에 경청했고 공감해주었다. 그런 뒤, 집세는 이전에 말한 비용보다 낮춰 받을 테니 넉넉하게 시간을 갖고 고민해보라고 했다. 그런 아주머니의 친절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왜냐하면 베를린으로 오기 전까지 나는 페이스북의 베를린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 집에 대한 안 좋은 후기를 꽤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불만의 주내용은 '집주인이 돈을 너무 밝힌다, 인색하다, 과도한 절약을 요구한다, 말을 함부로 한다' 등의 말이었다. 글 내용에 감정을 이입하다 보니 확실히 불만을 가질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래로는 그 아주머니를 비난하는 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나중에도 언급하겠지만 베를린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가득 모여있는 이 한인 커뮤니티의 영향력은 실로 강력하다. 그곳에서는 한국인들이 독일에서 생활하는 데에 있어서 크고 작은 이슈와 그에 대한 여론이 많이 생겨나는데, 그 시기에 이 아주머니의 집에 대한 여론이 강하게 들끓고 있었다. 안 그래도 불안정했던 내 상황에 그 사실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베를린에 살고 있는 한 동생에게도 이 곳에 방을 구하게 됐다고 말했더니 뜯어말리려고 했다. 난 이미 계약금까지 걸어놓은 상태라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들어온 집이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아주머니는 그렇게 매정하고 야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날 위해 미리 구입해놓은 생수라던지 쌀 같은 경우에 1센트까지 계산해가며 돈을 받으셨지만 그건 야박하게 생각할 일이라기보단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집에서 마트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고 특히 생수나 쌀과 같이 무거운 것을 마트에서 집까지 갖고 오는 일은 정말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두 채의 집을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큰 집에서 여러 유학생들과 생활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했다. 특히 비용적인 부분은 사소한 것들까지 확실하게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터질 때 서로 감정이 상하는 일들이 많다고 했다. 물론 아주머니는 말을 자상하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독일인 남편과 결혼해 수십 년간 독일에서 살아온 탓에 사용하는 어휘나 단어가 50년 전의 한국사회에 멈춰있는 듯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적당히 좋게 말하거나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다. 나야 워낙 그런 돌직구 같은 스타일의 말을 일할 때부터 많이 들어왔다 보니 감정이 상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몸이 불편한 아들과 같이 사는 아주머니는 말이나 행동은 드세보였지만 어딘지 슬프고 고독해 보였다.


꽤 오랜 시간 이어진 대화의 주제는 내 이야기에서 아주머니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6,70년대 한국은 실업난과 외화부족 사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같은 시기 독일은 2차 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과 노동력 감소로 간병인과 같은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간호인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해타산이 맞은 두 국가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약 10년간 만여 명의 간호인력이 독일로 넘어갔고 주인집 아주머니도 그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말이 간호지 그곳에서 했던 일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하고 끔찍한 환경이었다고 한다. 그저 고국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고 한다. 매달 들어오는 급여는 고국의 가족들에게 송금되었다. (실제로 파독 간호사들이 매년 국내로 송금한 1천 마르크 이상의 외화가 한국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하여 최근 역사적 재평가가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혹독한 삶을 버텨온 아주머니의 삶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이해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반대로 매사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아주머니의 눈에 현재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불평불만이 어떻게 느껴질지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다.


 이런 세대 간의 갈등은 국내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심지어 오랫동안 함께 산 부모 자식 간에도 그럴진대 독일에서 50년 가까이 살아온 아주머니와 한국에서 부모의 돌봄을 막 벗어난 어린 학생들과의 생각, 상식의 차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가 옳고 그르냐로 따질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도착한 날도 커뮤니티에 작성된 글이 한인 유학생들 사이에 일파만파 퍼져 예약이 취소되어버렸다며 아주머니는 하소연했다. 숙소를 운영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받게 되자 아주머니는 그 학생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법적 대응도 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학생은 게시물을 내리고 짧은 사과문을 커뮤니티에 다시 올렸다. 하지만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소문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독일에서 정착을 하며 생긴 고국의 가족 간의 마찰, 지병으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일, 아들이 큰 사고를 당하는 일 등 묵묵히 혼자 감당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날 아주머니와 나눴던 대화는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남는다. 대화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살아온 시대와 환경이 다른 아주머니와 내가 타국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 후로도 우리는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가거나 벼룩시장에 간 적도 있다.



 벼룩시장에 갔을 때의 기억이 난다. 아주머니 차를 타고 집에서 꽤 거리가 있는 벼룩시장에 갔는데 이것저것 구경하던 내게 아주머니는 불쑥 낡은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말했다. 집과 역의 거리가 꽤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아슬아슬한 상태의 낡은 자전거였지만 그 마음에 감동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이 조금 코미디처럼 흘러갔다. 커다란 자전거가 작은 차에 실리지 않았던 것이다.(아주머니가 구입을 결정했을 때부터 이미 난 그 사실을 직감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본인은 차를 타고 갈 테니 나에겐 이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 쿨한 말투에 난 압도당했다. 그렇게 쌩하고 가버리면 되려 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아주머니는 200미터 정도 앞서가다가 멈춰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또 200미터 정도 앞서가다가 멈춰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친절하게도 나의 길잡이가 되어준 것이다. 분명 천천히 오라고 했는데... 그 기다림이 부담스러워 난 심장이 터지도록 그 낡은 자전거를 밟았다. 심지어 절반 정도 왔을 땐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는데,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어져 실성한 듯 웃으며 페달을 밟았다. (유럽에 사람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잘 안 쓴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일까... 아주머니는 그저 인자하게 웃으며 차 안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반강제 라이딩을 그렇게 마치고 우린 케밥집에 들어갔다. 나는 케밥과 맥주를 시켰는데 아주머니는 안 드시겠다고 했다. 결국 난 또 기다리는 아주머니가 부담스러워 케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양은 또 얼마나 많던지, 다 먹고 나서 너무 배가 불러서 그날 저녁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어떻게 먹어야 하나 한참 고민했던 대형 케밥


 지난 6년간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배운 것들 중 가장 큰 배움이 있다면 나이 많은 어른과도 친구처럼 사귈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다. 그전까지는 늘 윗사람이 불편하다고 느낄 정도로 존대를 하고 나 자신을 누르고 감추는 게 습관이었다. 그게 예의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이는 나이일 뿐, 세대 차이가 크면 클수록 대화를 통해 얻어지는 희열의 폭도 크다는 사실을 안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그뿐이다. 최근 봉준호 감독이 시상식에서 '자막이라는 장벽만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멋진 말을 했다. 그 말을 응용해서 말하고 싶다. 나이라는 선입견의 장벽만 넘으면 우린 훨씬 더 많은 교훈과 삶의 진리를 서로에게서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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