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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Mar 18. 2020

15. 알고 보니 시골

'브레멘 음악대'가 떠올랐던 베를린 외곽의 마을

 내가 막 베를린 생활에 적응하고 있던 시기 평창 동계올림픽이 시작되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8시. 난 아침에 일어나 노트북으로 그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고등학생 때, 계속 불발되던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에 드디어 평창이 뽑혔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때는 그 기사를 보면서 "참... 너무 미래잖아~ 그 날이 되면 난 결혼해서 애도 있겠네~"하고 생각했다. 그 날 그 기분을 다이어리에 써놨기에 잊지 못한다. 그 정도로 먼 일로만 느꼈던 그 날이 성큼 오늘로 다가온 것이다. 그 날의 그 소년은 결혼은 커녕 안정과도 거리가 먼 백수의 아저씨가 되어 독일 어딘가에서 올림픽 개막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경기장 밖으로 화려한 불꽃쇼가 밤하늘을 수놓았고 이어서 놀라운 드론쇼의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찬란한 밤이었다.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떼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이제 막 정오가 지난 눈부신 대낮이었다. 하늘에는 막 이륙한 비행기 하나가 어딘가를 향해 자유롭게 날아가고 있었다.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근처에 공항이 있어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이 비행기다. 하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쟤는 어디를 목적지로 하고 날아가는걸까", "쟤는 어디에서 착륙하게 될까" 그렇게 자주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낯선 땅에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그러는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데?'하고 묻는 것으로 이런 상황은 늘 끝이 났다.


 노트북을 닫고 가만히 누워있는다. 조용한 가운데 숙소 어딘가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집에는 피아노가 몇 대 있어서 특히 음대생들이 많이 살았는데 낮에는 익숙한 피아노 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려왔다.




 낮에는 그림을 그렸고 오후 늦게서야 집 밖을 나섰다. 동네 산책을 했다. 아이폰의 지도를 지팡이 삼아서 여기저기 발 닿는 대로 걸었다. 이 동네는 어찌나 조용하고 인적이 없는지 돌아다니는 동안에 사람, 자동차보다 당나귀, 닭, 강아지, 말 같은 가축을 더 많이 마주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연과 하나 된 선진국의 풍경인가’생각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있던 곳은 베를린에서도 꽤 거리가 먼 C지역으로 전철 종점지인 곳, 다시 말해 도시 외곽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A가 가장 중심이고 그다음 B, C 순이다.) 베를린에서 미대입시 준비를 하고 있는 아는 동생 M을 만나기 위해 도시 A지역으로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때 펼쳐진 베를린 도심의 풍경에 조금 놀랐다. M에게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풍경을 말해주었더니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베를린에 그런 곳이 있다고?"


"응, 브레멘 음악대에 나오는 동물들을 다 만났어

난 그게 베를린인 줄 알았지..."


 M은 크게 웃었다. 당시의 나는 그만큼 내가 어디에서 무얼,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크게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았다. 내가 왜 이 동네에서 지내야 하는지 말할 수 없었지만 다른 곳에서 지내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어쨌든 그 날은 눈 앞에 펼쳐진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해가 점점 떨어지고 나서야 걸음을 돌렸다. 떨어지는 해와 넓은 시골 풍경을 바라보니 지금 내 삶도 어쩐지 황혼기에 접어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도 그 날을 떠올려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광활한 풍경 속에서 삶의 큰 문제라고 여겼던 것들이 부수적인 것들로 보이는 효과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가장 밑바닥에는 알 수 없는 고독감과 슬픔 같은 것이 깔려있었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날은 완전 어두워져있었고 밤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었다. 가방에 디카를 꺼내 잔디 위에 올려놓고 타이머를 걸어 별 사진을 찍었다. 얄밉게 느껴질 만큼 별들이 아름다웠다.


 '오늘은 산책을 했고 그래도 그림 하나를 그렸구나' 생각하면서 하루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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