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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Mar 31. 2020

16. 독일 미대 / 두근거리는 상상

교육의 참 의미, 상상해보는 미대 생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그림만 그리며 지내다가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독일에서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동생 M을 만나기 위해 베를린 중심인 알렉산더 광장(Alexander Platz)역으로 향했다. M은 벌써 몇 년간 유럽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다. 아는 동생에게 독일에 갈 계획을 갖고 있다고 했더니 동생은 M과 연락을 이어줬다. 사실 우리는 5년 전 우연히 술자리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나눴던 대화의 주제나 첫인상이 좋았어서 다시 연락이 닿아 만나는데 큰 거리낌이 없었다. M도 마찬가지가 아니였을까 싶다.


 당시 간신히 자동 로밍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난 독일의 통신사에서 좀 더 합리적인 가격의 유심을 구입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독일어는커녕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내게 독일 통신사 매장의 문턱은 심리적으로 매우 높게 느껴졌다. 난 한국에서도 통신사에 들어가 직원과 대화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워낙 다양한 요금제와 온갖 복잡한 결합상품 같은 것들이 있어서 직원의 복잡한 설명을 듣다 보면... 어느새 바다 한 가운데 외롭게 떠있는 돛단배가 된 기분이다. 심지어 지내고 있는 집의 위치도 깊숙한 시골이었던지라 귀찮음과 두려움이 적절히 섞여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때문에 독일에서 1년 가까이 생활하고 있는 M에게 어떤 통신사에서 어떤 요금제를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 그리고 또 어떻게 구입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게 되었다.


 우린 통신사 매장으로 들어갔다. M은 독일어보다 영어에 능숙했다. 독일 사람들은 대부분 독일어를 쓰지만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베를린에서는 영어만 사용해도 어느 정도는 불편 없이 생활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녀는 단발머리에 어딘지 기품이 느껴지는 검정 정장 스타일의 옷을 입고 나왔다.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오랜만에 번화가에 나와 유난히 더 긴장을 하고 있던 나에 비해 이 곳에 완벽 적응을 끝낸 '진짜 어른'같아 보였다. 심지어 유럽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조금 시니컬한듯한 그녀의 태도가 더 날 그렇게 느껴지게했다. M의 꽁무니만 따라 뒤에서 잠자코 유심을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이 참으로 우스웠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다 알고 있는 엄마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철없는 꼬마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어쨌든 그렇게 기다리던 독일 통신사의 유심칩을 구입했다. 대략 월 3-5GB 정도의 용량이 주어졌는데 이동을 할 때마다 나침반처럼 매번 들고 다녔다 보니 데이터는 늘 부족했고 월말에 가서는 추가로 데이터충전을 해야만 했다.


 우리는 근처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독일의 상징인 생맥주와 소시지 그리고 슈바인학센(Schweinshaxe)을 먹었다. 독일에서 만난 나의 첫 소시지 요리는 생각했던 소박한 느낌의 음식이 아니었다. 감자 위에 올려진 거대한 소시지는 한 끼 식사로도 충분했다. 슈바인학센은 독일식 족발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한국식 족발은 삶는 방식이라면 독일식 족발인 학센은 구운 방식으로 겉은 바삭한 식감을 갖고 있다. 그 이후에 다른 지역에서도 종종 학센을 먹었지만 맛이 아주 좋았다.


 M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중심부에서 너무 멀지 않냐고 했다. 그리고 주인집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며 베를린 중심으로 와서 지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마침 베를린예술대에 다니고 있는 친구가 이번에 방학을 맞이해 한 달간 한국에 다녀온다고 괜찮은 학생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원 거주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월세를 내고 잠시 임시 거주를 하는 것을 '사이', '중간'이라는 뜻의 '쯔비셴(Zwischen)'이라고 부른다.)


 SNS 상에 주인댁 아주머니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얼마나 떠돌고 있는지, 그래서 M이 우려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는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장황한 설명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아주머니의 특질적 성격이 누군가에겐 마귀할멈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누군가의 눈엔 거칠지만 정감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동성이 좋은 베를린 중심에서 지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은 제법 구미가 당겼다. 사실 그 시기에 나는 다양한 박물관, 미술관을 가까운 거리에서 편리하게 다닐 필요성을 느꼈다. 또 괜찮은 어학원이 많이 위치한 곳도 베를린 중심 쪽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독일어 어학원을 다녀보자는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M의 친구가 잠시 한국에 나가 있는 한 달간 그 친구의 기숙사에서 살아보자는 결정을 하게 됐다.


 며칠 뒤. M의 친구 J를 만나게 됐다. 우리는 J가 살고 있고 곧 내가 한 달간 지내게 될 동네로 갔다. 역 앞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파스타를 먹으며 간단한 소개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J는 매우 차분한 성격에 베를린 국립 예술대학(Universität der Künste Berlin, UDK )에서 재학 중인 학생이다. 나는 미대를 나오지 않아서 미술대학에 대한 갈증까지는 아니어도 호기심 같은 것이 늘 있었다. 국내 교육기관에서 이뤄지는 교육 방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직간접적으로 들은 것들이 있어서 예상이 가능했지만 독일 미술대학에서는 어떤 식으로 학생들과 소통을 하고 또 어떤 배움의 장이 있을지 매우 궁금했다. 초면이었지만 좋아하는 예술가도 같았고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한다고 여겨졌던 나는 조금의 거리낌없이 이런저런 궁금한 것들을 동생인 J에게 마구 물어보기 시작했다. J도 흥미로웠는지 현재 자신의 학교 생활에 대한 이모저모를 말해주었다. 미대를 준비하고 있는 M도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질문을 좋아하는 독일 교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본인은 독일 미대에 들어오면 교수가 길잡이가 되어 새로운 방법론, 기술, 이론 들을 설파해줄 것이라 기대했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되려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이건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이건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묻고 또 물었다고 한다. 그렇게 질문을 받는 것이 처음엔 꽤 당혹스럽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고 J는 말했다. 또 반대로 학생의 질문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학생 쪽에서 질문을 하지 않으면 교육에 관련해 어떤 도움이나 조언도 잘 해주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난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독일 미대에 대해 가슴 떨리는 기분을 느꼈다. 


 난 질문을 좋아한다. 받는 것도 던지는 것도 정말 좋아한다. 엄마는 내가 처음으로 배운 한국말이 "이게 뭐야?"라고 했다. 답변해줘도 이해할 능력도 안되면서 그 말이 습관이 되어서 어른들만 보면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질문을 던져 어른들을 곤욕스럽게 했다는 (심지어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내 질문에 이골이 나서 하룻밤 주무시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신 적이 있다고...) 일화는 귀가 닳도록 들었다.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Was ist das?(바스이스다스?)"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질문을 던졌다. (역시나 답변을 들을 능력은 전혀 안되면서...) 그것은 누군가의 눈엔 피곤하고 우습게 보이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저변에는 '강력한 호기심'이 깔려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난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되려 가정을 벗어나 소위 정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을 받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질문'이라는 것에서 멀어진 게 아닌가 싶다. 한 번은 초등학생 때 선생님께 수업 도중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의 성질이 무척 엉뚱했는지 "도대체 지금 그게 왜 궁금한데?"라고 핀잔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때 친구들 앞에서 느낀 민망함의 감정이 지금까지도 상처로 남아있다. 그 이후로 어른이 되어가면서 난 더욱 질문을 주고받는 분위기로부터 멀어져 갔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을 주고받는 일이 그 어떤 인간의 활동보다도 위대한 행위라고 난 지금도 믿는다. 누군가가 나에게 "나 궁금한 게 있는데-"라고 운을 띄우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슴이 뛴다. 그건 사람과의 관계, 사고의 영역을 무한대로 넓혀줄 수 있는 멋진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Education(교육)의 어원은 '끌어내다'라는 의미인 educe라고 한다. 뭔가가 들어와 텅 빈 나를 채워주길 바라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내 안에 꽉 차있는, 하나 어쩌면 평생 열리지 않을지도 모를 무언가를 꺼내보이기 위해서 교육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의 참 의미를 되짚어보면 한국의 주입식 교육과 독일의 끄집어내는 방식의 교육 차이에 대해 더 확실히 느끼게 된다. 더불어 우리들의 잘못된 교육방식으로 인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잠재력들이 열등의식 속에 사장되어왔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질문광인 나에게 이런 독일식 학교생활의 단면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 아무 계획이 없던 나에게 어쩌면 독일 미대가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작게나마 하게 됐다. 


 집으로 돌아와 주인집 아주머니에게는 상황을 설명했다. 아주머니는 어디가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며 잘 지내라고 말씀해주셨다. 역시 그녀답게 쿨하면서도 따뜻한 말이었다. 그렇게 베를린 외곽의 작은 마을 말로우(Mahlow)에서의 짧은 생활을 마치고 나는 베를린 중심으로 이사를 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추억을 남긴 나의 첫 독일 숙소


 크고 무거운 캐리어와 백팩을 메고 이사 가는 날. 날씨는 무척 화창했다. 짐이 무거워서였을까 별 목적 없이 이사를 간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기어가는 듯한 내 모습이 마치 껍데기를 이고 걸어가는 달팽이처럼 느껴졌다. 


새로 살게 될 곳은 베를린 중심의 S반 열차가 다니는 Westend역 근처였다. 동생 J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나와 만나 기숙사 방에 대한 안내와 주의사항들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다.


"형, 저 한국에서도 완전 올빼미족이라 시차 문제없으니까.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보이스톡으로 연락 주세요."

"고마워요. 한 달 뒤에 이 열쇠를 다시 돌려줄 때, 제가 뭔가 결정을 내린 상태였으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아마 형은 좋은 선택을 하실 거예요."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다. 주어진 시간은 딱 한 달이었다.


저녁 해가 잘 들어오던 새로운 기숙사


Westend 역 근처를 그린 그림 / Berlin 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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