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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Jun 04. 2020

17. 본격적인 베를린 도심 생활

  J는 서울로 떠났고 나는 그가 살던 대학 기숙사 아파트에서 한 달간의 생활을 시작했다. 베를린 외곽(시골)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중심부에서 살기 시작했으니 뭔가 특별한 일상이 펼쳐질 법 하지만 그곳에서도 내 삶의 뚜렷한 방향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제 멋대로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여전히 나는 집 근처의 마트를 찾아 그곳에서 식재료를 사고 집에 와서 요리를 해 먹는데 재미가 붙었다. 베를린 안으로 들어온 건 다양한 전시, 카페, 건축물 들을 빠르고 편하게 접하려는 의도였지만 그 전에 나에게는 수수께끼인 독일 마트에서 다양한 품목을 살펴보는 게 더 즐거운 우선순위였던 모양이다.


 하루는 마트의 신기한 재료와 저렴한 가격에 신이 나서 카트에 이것저것 담다가 돌아오는 길에 무척 애를 먹은 날도 있다. 앞뒤 재지 않고 온전히 현재의 본능에만 집중하는 그런 유형의 음... 단순무식 인간인 것이다. 더 웃긴 사실은 내가 어떤 요리를 해먹을 지 생각을 하고 장을 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본능에 따라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아와서 부엌 테이블에 펼쳐놓고는 이 품목들을 어떻게 먹을만한 형태로 조합, 조리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식사를 하기 전 완성된 요리를 접시 위에 올려보면 식전이 아니라 식사 후로 보일 정도로 형편없는 꼴인 경우가 허다했다. '전공했던 요리를 포기하고 진로를 바꾸길 정말 잘했어...'하고 과거의 나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마트에서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먹고 나면 시간은 벌써 오전에서 오후로, 낮에서 저녁으로 훌쩍 흘러가버렸다. 신기한 체험이었다.


 설거지를 쌓아둔 채 그대로 침대 위에 눕는다. 그리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현재의 나 자신을 자각하고 동시에 그동안 내 주변을 감싸고 있던 관계들을 떠올린다. 한국에서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내 가족, 친구들... 나는 이 곳에 무엇을 위해, 왜 왔을까? 도대체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그림을 계속 그려야 할까? 다른 기술이라도 배워봐야 할까? 독일어는? 왜 독일? 이런 사춘기 학생 같은 질문을 지금 이 나이에...?


 겉보기엔 세상 누구보다도 편한 팔자의 모습이지만, 그런 질문이 날 에워싸고 현실을 자각하게 될 때마다 천장이 아래로 날 짓누르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럴 때면 몸을 일으켜 어디로든 애써 나가자는 생각을 하고 밖으로 나갈 이유를 만들었다. 한 동안은 이런 하루의 연속이었다.


-


 비 내리는 어느 저녁, 컴퓨터를 하다가 우연히 베를린 유학생 커뮤니티에 '맥도날드 빅맥 1유로 쿠폰!'이라는 글을 봤다. 행사 이미지를 폰에 저장해서 가져오면 1유로에 빅맥을 준다는 것이었다. '파격적이네...' 생각했다. 마침 저녁 해먹기도 귀찮던 찰나였던지라 난 우산을 들고 맥도날드를 향했다.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였다.


 도착해서 주문을 하고 내 번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4-5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다. 모니터에는 주문 대기 번호가 적혀있었고 메뉴가 준비되면 직원이 직접 번호를 불러서 고객이 받아가는 시스템이었다. 그 시스템이 내게 조금 불리하다는 사실을 아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시 초급 독일어 책으로 공부를 하던 나는, 숫자 독일어를 현지인의 입을 통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1(아인), 2(쯔바이), 3(드라이), 4(피어)... 한 자릿수까지는 그래도 더듬더듬 말하고 들을 수 있었지만 그때 나의 대기번호는 아쉽게도 389번쯤이었다. (독일어는 유난히 단어가 길기로 유명하다.) 목소리는 컸지만 말 속도가 빠르고 불친절해 보이는 직원은 빠르게 준비 완료된 메뉴의 번호를 외치고 있었다. 아무리 귀를 기울이고 노력해봐도 그 소리는 내 귀에 외계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던 찰나에 내 차례가 왔음을 알게 됐다. 왜냐하면 분주하던 프런트에 아무 고객도 나타나지 않았고, 주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목청껏 번호를 외치는 직원과 나의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서둘러 번호표를 들고 직원에게 갔다. 직원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빅맥을 건네줬다. 내 옆에 아빠 손을 잡고 있던 귀여운 남자아이는 눈이 둥그레져 날 이상히 쳐다보았다.


 다시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임무는 완수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 맞은 생쥐꼴이 된 기분이었다. 독일어로 숫자 하나 제대로 못 알아듣는 서른 살 아저씨는 도대체 베를린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노트북으로 평창 동계올림픽 하이라이트 뉴스를 보면서 빅맥을 먹었다. 전철역, 버스터미널, 슈퍼마켓 등... 독일 여러 매체에서도 평창올림픽 소식을 빠르게 전했다. 자국에서 펼쳐지는 대회여서일까. 한국 국가대표선수들은 국제 대회에서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목표를 위해 분투하고 있다.


 빅맥을 급하게 먹어서인지 속이 더부룩해져 산책을 하고 싶었다. 집을 나와 베를린 동물원 역 쪽으로 버스를 타고 산책을 했다. 역 근처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가게와 사람들을 구경했다. 갑자기 인터넷 뱅킹으로 돈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이 울렸다. '그럴 일이 없는데...' 확인해보니 '예금결산이자'라는 이름으로 125원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걷다 보니 오른 편에 큰 쇼핑몰 건물 하나가 나왔다. 건물 꼭대기를 올려다보니 분홍색 글씨의 사인보드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거기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Life is beaut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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