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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Jun 11. 2020

18. 따뜻한 사람 (유학생 형 Y)

재미있는 인연, 마침내 독일에서의 만남

 베를린 도심으로 이사를 가 한량처럼 지내는 날들이 꽤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독일행에 힘을 실어주었던 대학생 Y형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아직 얼굴조차 모르는 소중한 인연의 Y형은 원래 베를린에 도착하면 내가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마침 형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이탈리아에 가게 되어 그 만남이 몇 주 미루어졌었다. ( 재미난 인연에 대한 이야기는 : https://brunch.co.kr/@hum0502/37 )


 내가 한국에서의 미래에 불안을 느끼면서 동시에 무턱대고 끊어놓은 베를린행 티켓에 대해서도 벌벌 떨고 있을 때, 먼 이국 땅에서 형은 나를 격려해주었다.


"잡생각이 너무 많아질 땐 독일어 단어라도 외워봐요.", "여기 와보면 예상외로 일이 술술 풀리기도 해요. 물론 예상치 못한 부분이 발목 잡기도 하지만요.", "너무 어렵게 복잡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봐요. 결과가 어떻든 그 시간과 비용이 아깝지 않을 만큼 분명 인생에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진심이 느껴지는 따뜻한 말이었지만 내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툭툭 가볍게 던지던듯한 그의 말투에서 난 더욱 큰 배려를 느꼈다. 그런 그를 드디어 만난다. 약속날이 가까워질수록 기대와 설렘이 가득 찼다.




  오랜만에 집 밖을 나섰다.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은 흐렸고 거리는 한산했다. 초행길이라 형을 처음 만난 지역이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곳을 찾아가던 길의 풍경, 그때의 감정만큼은 세세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역 앞에서 짧게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며 근처의 카페를 찾아갔다. 테이블이 서너 개 밖에 없는 아담한 카페였다.


 난 자리에 앉자마자 온라인상으로는 미처 전하지 못한 감사의 마음을 쏟아냈다. 실제로 만난 Y형은 내 예상보다 훨씬 털털한 태도의 사람이었고 나와는 다르게 삶의 매 순간들을 복잡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의연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 글을 쓰며 생각하건대 형의 털털한 성격상, 내 과도한 감사 표현이 그때는 꽤 부담스러웠겠다 싶어 웃음이 나온다. 난 그런 형의 삶의 태도가 신기했고 또 부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이 오직 형의 타고난 천성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나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타국에서 10년 가까이 살다 보면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보통 사람들보다 몇 배 더 강하게, 그리고 빨리 느끼며 살았을 것이고 그런 환경 속에 늘 일희일비하다가는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좀 더 삶의 깊은 부분으로 대화가 이어 어질수록 그런 내 생각은 강해졌다. 그 의연함 뒤에 쌓여있을 말 못 할 많은 이야기들이 조금이나마 짐작되었다. 형에게도 현재의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있고 또 삶의 본질, 나아가 이 세상의 현상들을 넓은 눈으로 바라보고 사색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인 상황에서부터 그동안 해왔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형은 베를린의 미술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마지막 대화 주제인 '세계평화'까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형도 그 주제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좀 더 알게 되었다.


 헤어지기 전, 우리는 알렉산더 플랏츠(Alexander platz) 역 근처 아시아마트에 들렀다. 형이 반찬, 식사 때문에 조금 곤란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날 그 곳에 데려간 것이다. 마트에는 다양한 아시아 국가의 식가공품들이 있었는데 특히나 반가운 한국의 김치, 라면, 쌈장 같은 것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형은 선물이라면서 몇 가지 품목들을 장바구니에 담아 계산해 주었다. 아마 자신의 초반 유학생활을 떠올리며 이것저것 챙겨주었던 게 아닐까 싶다. 형의 그런 따뜻한 배려가 몇 날 며칠을 집에서 홀로 생활하던 내겐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시아 마트에서 데려온 나의 보물들



 그 이후로도 형과는 공원에서 만나 맥주를 마시거나 집에 초대받아 식사도 하면서 종종 안부를 주고받았다. 대부분의 주제는 불안해하는 나의 하소연이 주를 이뤘던 것 같아 뒤늦게 민망해진다. 형은 나에게 심리상담가 혹은 의사 선생님과도 같았다. 실제로 어느 날엔 복통이 너무 심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나를 데리고 병원도 찾아가 주었다. 독일인 의사에게 내 증상을 설명해주고 또 검사 이후의 결과나 주의할 점에 대해서도 형을 통해 안내를 받았다. 그렇게 형 Y는 심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어리숙하고 위태로운 내게 정말 아버지이자 선생님의 역할이 되어줬다. 난 지금도 형에게 "형은 저한테 베를린 아버지예요."라고 종종 농담 섞인 말은 한다. 당연히 형은 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를 치지만...



 약 1년간의 베를린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아이가 아버지한테 칭얼대듯 형한테 이렇게 말했다.


"형, 저 다시 돌아가요.

돌아가서는 주변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정말 제 그림에만 집중하면서 저 답게 살려고요.

아마 망할 확률도 높겠죠. 그래도 저 지켜봐 주세요~”


그러자 형이 말했다.


"안 망해. 진짜 너가 망하면 내가 너 책임질게."


베를린을 떠나 한국으로 오기 전 가장 큰 힘이 되었던 말이다.

당연히 내가 형에게 기대거나 또 걱정을 끼칠 일은 없겠지만...

그 말 한마디가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어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있는지 모른다.


다시 형을 만날 때는 그때보다 밝은 모습과 당당한 눈빛으로 인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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