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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Jun 26. 2020

19. 타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사람들 (1)

타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용기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서 보내던 나는 유학생 Y형을 만나고 나서 마음의 빗장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선택의 해답은 내 안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나 아닌 다른 환경의 인생을 만나 거기에 내 인생을 비춰보고 상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나와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를수록 불편함을 동반하지만 딱 그만큼 더 큰 배움을 준다.


 난 이렇게 다양한 환경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내 인생의 카메라(뷰파인더)를 늘려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선천적인 환경에 의해 내게 반강제로 주어진 삶의 카메라로 바라보던 모든 것들이 납작한 평면의 세계였다면.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부터는 전혀 다른 시점으로의 사고가 가능해지면서 점차 세상을 입체적으로 보기 시작하게 되는 것 같다. (말하다 보니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르게 보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던 데이비드 호크니의 포토그래피 작업물이 떠오른다.) 그건 굳이 과정을 통해 어떤 정답이나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한 번 그 관점으로 세상을 보았다는 경험 자체에 의미가 있다. 내용에 따라 마음 깊이 공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더라도 같은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까지의 이해나 수용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보통 그것을 사람들은 관점이라고 부를 텐데 사진을 좋아하는 나는 그 관점이라는 단어를 카메라로 대체해 부르는 것을 즐긴다.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하고 익숙한 곳을 떠나 여행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베를린, 유럽에서의 정착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하던 나는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수년간, 내 주변에는 유럽에서의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언어를 배우고 싶어서, 관심 있는 분야에 더욱 깊이 빠져보고 싶어서, 자신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사고방식에 지쳐서, 현재의 직업에 회의나 권태를 느껴서 떠난 사람 등... 저마다 그 이유는 달랐지만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한 선택으로 떠나는 그들의 모습이 내 눈엔 어딘지 멋지게 보였다. 내 생활에 쫓겨 지내다 보니 한 동안 그들의 소식을 제대로 묻거나 듣지 못했다. 그런데 유럽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떨어지니 잊고 살던 사람들의 안부가 다시금 궁금해지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들에게서 이젠 희미한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소식과 안부가 진심으로 궁금해 조심히 연락을 시도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사하게도 내 연락을 기쁘게 받아주었다. 더불어 다양한 방식의 친절까지 베풀어주었다.


 수십 년간의 커리어를 자랑하던 디자인일을 접고 요리를 배우러 돌연 파리로 떠난 L누나, 초콜릿이건 빵이건 인테리어건 뭐든 제대로 맛보고 배우고 싶다며 아무 대책 없이 파리로 떠난 동창 B,  멋진 파티셰를 꿈꾸며 2년째 런던에서 생활하고 있는 K동생, 높은 입사경쟁률로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동반 취업했지만 치열한 직장생활에 지쳐 사표를 던지고 런던으로 떠난 H 부부까지. 뜸해졌만, 늘 내 마음에 도전과 여행을 꿈꾸게 만들었던 그들이 유럽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미대를 나와 겸임 교수, 대기업 디자인 회사에서 까지 일하다 모든 것을 접고 오직 요리를 시작하기 위해 파리로 온 누나 L은 내게 큰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퇴사를 앞두고 우울이 깊어져 잠이 안 오던 어느 늦은 밤. 파리에 있는 누나에게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 누나, 파리에서 지낼만해요? 저 곧 회사 관둬요.

그림도 이제 그만 그려야 할 것 같고... 독일에서 기술이라도 배워볼까 생각해요.

사실 아무 계획이 없어요. 무서워요. "


"잘 생각했어. 좋아. 뭐라도 할 수 있어.

나훔아 나도 계획 없어. 무계획이 계획이야. "


무계획이 계획.

가장 힘들 때 들었던 그 말이 그 이후로도 곱씹을수록 달달한 맛이 나서

지금까지도 인생의 신조로 삼고있다.

심지어 올해 봄 치러진 개인전 제목도 '계획은 없습니다'였다.


그 무계획의 유럽 여정 속에서 만난 내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음 편에서 간략하게 하고 싶다.




올해 3월에 열렸던 개인전 '계획은 없습니다' 포스터


파리로 떠나기 전 베를린 숙소에서 바라본 밤하늘.
창문과 옷걸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달빛이 벽에 그려져 장시간 노출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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