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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Jul 14. 2020

21. 5년 만에 만난 친구와 오르세 미술관

5년 만에 파리에서 만난 친구 K 그리고 오르세 미술관

 파리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L누나는 오늘도 근사한 아침을 제공해줬다. 쫀득한 바게트와 버터, 사과, 복숭아 그리고 적당히 거품이 올라간 커피였다. 식사를 마치고 누나는 선약이 있다고 해서 먼저 나갔고, 나는 천천히 집 안팎을 구경했다. 어제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던 주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편엔 편안한 소파, 또 한쪽 편엔 채광이 좋은 커다란 창문 그리고 정면의 벽엔 예술가들의 그림과 사진들까지. 굳이 분위기 좋은 카페나 여행지를 찾아 밖으로 나설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집 안의 분위기는 편안하고 아늑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옆집 건물과 정원이 내려다 보였다. 잘 정돈된 화단과 화분들을 둘러보았다. '프랑스 주택은 이런 느낌이군' 생각하며 여유를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날씨가 좀 춥다고 느끼긴 했는데 눈까지 내릴 줄이야...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시간은 정오를 넘겼다. 목도리를 단단히 둘러메고 밖을 나섰다.




 그 날은 대학 동기 K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약 십 년 전 우리는 학교에서 요리를 공부하며 알게 됐다. 나는 일찍이 전혀 다른 진로를 택해 살아갔지만 K는 여전히 전공을 살려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무작정 파리로 넘어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2013년. 어느 날 갑작스럽게 녀석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홍대 근처 고기뷔페에서 저녁을 먹었다. 당시 우리의 가벼운 주머니와 커다란 위를 고려한 최적의 장소였다.


 K는 말수는 많지 않아도 종종 유치한 농담을 하며 싱글벙글 잘 웃는 친구다.  그날도 역시 밝은 모습이었지만 가끔씩 마음이 복잡해 보이는듯한 표정이 포착됐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파리로 떠날 날이 정말 며칠 남지 않은 것이다. 이제 막 회사생활 2년차였던 나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도전이 그저 놀라울 다름이었다.


" 파리에 가서 뭐 할 생각인데? 과자? 초콜릿? 취업? 학교? "

" 딱 정한 건 아닌데~ 많은 걸 보고 배우고 싶어~ 디자인도 인테리어도 디저트도 전부~ "


 이야기를 들어보니 티켓과 비자를 제외한 나머지 준비는 전부 빈약해 보였고, 간간히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조금은 자포자기 심정 같아 보였다. 막연한 친구의 계획이 조금 염려스러웠다. 또 서글서글한 인상 때문인지 국내에서도 임금 체불로 고생한 적이 있고, 예전부터 힘든 일은 무작정 부딪혀보고 그 이후에 괴로워하는 친구였다. 물론 그 힘든 순간들을 매번 강한 인내심과 성실함으로 극복했었지만 외국에서도 그런 방식이 통할지 의문이었다. 매사에 자기 속마음을 숨기고 당찬('척'인지도 모르겠지만) 모습을 잘 보여주던 친구였는데 그 날만큼은 꽤 심정이 복잡해 보였다. 그 불안한 감정이 내게도 전달됐다. 분야는 다르지만 가슴이 이끄는 희미한 무언가를 막연히 쫓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닮아있었다. 밥을 먹으며 서로 하소연과 위로를 주고받았다. K는 당시 회사생활을 하면서 퇴근 후 목적 없이 그림을 그리던 나를 뭐라도 되는 듯 멋있다고 치켜세워줬다. 난 웃으며 너스레 떨지 말라고 말했다. 평일 저녁, 홍대역 부근 대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 버스정류장에서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렇게 약 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친구가 일하고 있다는 가게 근처로 향했다. 거리엔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역 근처에 다다랐을 때, 멀리서 갈색 빵모자에 알록달록 목도리를 멘 K가 걸어왔다. 우린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야 내가 파리에 5년 동안 살면서 눈 내리는 걸 처음 봐~! 이런 날 파리에 오다니 너가 아주 축복을 받은 것 같다. 푸하하" 친구가 놀리듯 말했다. 전보다 훨씬 밝고 여유 있는 친구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는 산책을 하면서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을 향했다.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렸고 미술관의 대기줄도 길었던 탓에 그동안 쌓인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부지리로 도망치듯 파리에 온 나에 비해 더 어린 시절 용기를 내 이 곳으로 와 잘 적응하고 있는 K가 더없이 멋져 보였다.


 늘 그렇듯 어느새 나는 인터뷰어가 되어 친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족과는 연락을 자주 하는지, 마지막으로 본건 언제인지, 보고 싶지는 않은지... 와 같은 질문이었다. 이런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가족, 친구들을 염려시킨 채 외국을 떠나온 나의 부채감과 그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으리라.  친구는 덤덤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부모님을 두고 왔다는 마음도 있지만 각자의 인생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고, 반대로 이 곳의 터전을 잘 닦아놓으면 상황에 따라 부모님을 모셔올 수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삶의 방식이라는 게 정답은 없지만 친구의 그런 태도가 당시의 나로선 존경스럽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입장 차례가 왔다. '파리에 왔으니 그래도 미술관에는 한 번 가봐야지' 하는 마음에 파리의 여러 뮤지엄에 갈 수 있는 패스를 구입했다. 하지만 파리에 온 이유가 어떤 미술적, 예술적 영감을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보니 입장 전부터 커다란 설렘이나 흥미가 생겨나지는 않았다. 물론 전부터 멋진 작가들의 그림을 한 번쯤은 내 눈으로 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엔 그보다 더 삶의 근원적인 부분이 작동되지 않던 상태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마음을 흔드는 작품 앞에선 한참을 서있기도 했는데 이내 삶의 허무함과 냉소적 감정이 은은하게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처음 경험한 파리의 미술관은 역시 상상 이상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그림과 웅장한 공간에 압도되었다. 혼자 천천히 작품 감상을 하는 걸 즐기다 보니 친구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중간중간 등장해서 친구는 귓속말로 "가방 훔쳐가지 못하게 조심해. 앞쪽으로 메"라고 말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유명 작가의 작품 앞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린 사람은 이제 죽고 없지만, 그 작품은 시대를 넘어 다양한 연령과 국적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근사하게 여겨졌다.


 특히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그곳엔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화가 있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가서 가장 보고 싶었던 그림은 바로 고흐의 그림이었다. 도슨트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어로 그림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듣게 되는 테오를 향한 고흐의 편지는 작가가 얼마나 예민하고 기민하며 또 따뜻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쉽게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현실에 부딪혀 불안과 자괴 속에 살면서도 끝까지 눈앞의 세상을 뜨거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창조해나가던 그의 찬란한 정신에 깊은 존경과 연민이 싹텄다.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아보지 못한 작가의 그림. 그 앞에는 현재 인증샷을 위한 수많은 손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불공평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이 새삼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고흐의 초상화



 그렇게 천천히 여유롭게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는데 친구가 급하게 다가와 말했다.

"이제 곧 폐장 시간이야! 한 시간도 안 남았어. 맨 위층에 모네의 그림이 있으니까 꼭 봐"


'아차... 맨 위층에 모네의 그림들이 있구나'

 온갖 신기하고 진귀한 예술작품들에 정신이 팔려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더군다나 모네의 그림이 위층에 몰려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짧은 시간 서둘러 그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시험 전날 벼락치기 훈련 덕분일까... 시간이 긴박하면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되는 때가 있는데 이 날이 그랬다. 짧은 시간이 무척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지나치며 만났던 세잔, 고갱의 그림 앞에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구석구석 감상했다. 모네의 명작인 '파라솔을 든 여인' 은 순식간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햇빛의 따사로움, 그림자의 서늘함, 냄새까지 자연스럽게 상상됐다. '나도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생각했다.


모네의 그림


 폐장시간에 쫓겨 미술관을 뛰어다니다시피 하던 내 모습을 지금 떠올려보니 참 우습게 느껴진다. 난 정말 미술 감상을 진지하게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나도 그 그림 봤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알 수 없다.

 

 이윽고 미술관 폐장시간이 가까웠다. 분주하게 미술관 끝까지 관람을 마칠 즈음 퇴장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검은 정장의 관계자들이 퇴장을 알리며 양치기처럼 관람객들을 천천히 출구 방향으로 몰았다.




퇴장하는 길 전시장 꼭대기에서 바라본 건너편의 몽마르트 언덕


 해가 떨어지고 하늘엔 달이 떠올랐다. 길거리는 저녁의 활기로 북적였다. 퇴근한 K의 여자 친구를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낮동안에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근황을 나눴다면, 저녁식사 때는 5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뭔가 순서가 바뀐 것 같지만... 어쨌든 그동안 그가 겪은 일들이 내겐 너무 놀랍고 강렬했어서 다음 편에선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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